6월 11일 토요일 아침묵상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저는 말이 쓸데없이 적고
생각은 쓸데없이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철학에 관심이 크게 생겨서
자주 리서치하고 공부합니다.
아마도 제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저로 하여금 너무 일찍,
산다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비록 이기적(?)이게 재미없어도 ㅋㅋ
오늘 묵상은 저의 개인적인 철학적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서
지루하다는 점은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적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살고자 하는 동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랜 역사와 여러 문화를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를 고민하였고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저도 같은 주제에 대해서
아주 자주 그리고 많이 생각하고 있으며
제 나름대로의 답을 찾으려고
열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의 신앙과 믿음은
실존주의라는 신앙과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실존주의 철학이 어떻게
저에게 신앙적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얘기 나누려고 합니다.
실존주의는(Existentialism)
20세기 사르트르가 주장하였던 철학으로서
그때까지 철학의 주류이며 대세였던
본질주의 철학에 대항하여
본질보다는 존재의 의미를 강조하는 철학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혁명적인 철학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 이전까지의 철학의 주류는
본질주의(Essentialism) 철학이었습니다.
본질주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기초로 해서
발전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주의 철학은
사람마다의 본질은(Essence)
태어나기 전 부터 정해져 있다는 철학입니다.
본질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어서
교회나 사회적 권위자(철학자)가 가르쳐 주는 삶을
인생의 정답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본질주의 철학이 대세를 이루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등
끊임없는 대규모 전쟁과
그 전쟁들로 인한 불경기와 후유증으로 인해서
깊은 좌절감과 허무함에 빠졌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의문시 했고
홀로코스트의 무시무시한 사건은
더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과 질서가 있는 세상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치 사회적 불안과 허무는
니힐리즘(허무주의)을 탄생시켰고
니힐리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니힐리즘 또는 허무주의는
인간이 추구하려는 이상적인 도덕과 질서가
인간의 실제 삶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철학과 생각들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라는 명제(Mantra)로
실존주의 철학을 설명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자기만의 본질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자신만의 도덕 체계를 형성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본질보다 앞서는 존재의 자유입니다.
인간의 존재에 허락된 자유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자유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책임 역시
스스로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의 본질과 가치와 도덕의 결정을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강력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허락된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타인(부모, 선생, 목사 등)들의 주장이나 생각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따라하려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자유를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교, 예배와 묵상을 통해서
자신 만의 삶에 적합하게
예수님이 뜻하셨던 바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삶에 질문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날마다 개선하면서 사는 것이
저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저는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이
아주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주신 인간의 자유를
자기중심적으로 잘못 사용할 여지와 위험도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유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믿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자유가
사르트르가 얘기한 자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위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제한하거나 틀에 맞추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이상적 가치를
성실하게 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백을 결론짓습니다.
스스로의 자유 함을 고백하고 나서
스스로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고 선언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실존을 지키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을 충실하게 지켜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처럼
저 역시 제게 주어진 자유를 충분히 누리면서도
긍휼하고 관대하고 속단과 편견이 없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길 원합니다.
자유교회
이 상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