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월요일 아침묵상–부정한 병
마가복음 1:40-42 (표준새번역)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him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ling," he said. "Be clean!"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유대 종교문화에서
나병(한센병, 문둥병)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 걸리는
불치의 병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몸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죽은 자로 여겼으며,
나병 환자가 병에서 낫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유대문화에서 나병은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불치의 병이며
저주와 재앙의 병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나병을
그 사람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병환자를 동정하거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병환자를 본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부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멀리하고 부정하게 여겼던 이유는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 환자가 접촉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장소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부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가족이나 이웃들과 함께 살 수 없고
격리되어 따로 혼자 살거나
나병환자들끼리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레위기 13: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그렇다면, 율법이(성경이)
나병환자를 부정한 사람이라 여겨
사람들과 격리시키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받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막 탈출하여 광야를 전전하며
천막을 치고 공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은
전염병이 도는 것이었습니다.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전염이 될 것 같은 병이 누군가에게 생기면
그 사람을 격리하는 것이
병의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염될 수 있는 병에 걸리면
그 사람을 격리시켜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막는 것이
그 병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율법이 병에 걸린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게 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접근하였다가
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이 만진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이라고 여긴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만진 것을
건강한 다른 사람이 만지지 못하게 해서
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성경)이
이런 것까지 자세하게 기록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의학적 지식이 없던
당시 사람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종교적 규율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성경)이
나병환자를 격리하도록 하였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저주라는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의학적 이유 때문이 훨씬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살리고 보호하기 위한
율법의 규정이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정한 병에서
사람의 생명을 지키려고 했던 율법이
병든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여기는 율법으로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문화는
종교적 정결함,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러운 것,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분리하고 격리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정결함이나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소위 문제가 있는 사람들 또는 죄인들을
담을 쌓고 격리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깨끗함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그들의 “정결함”, 또는 “거룩함”은
절대로 “더러움”, “부정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하다고 하는 사람이
만지기만 하면, 접촉하기만 하면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해지고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정결함 또는 거룩함이
더러움 또는 부정함을 이기려면
거룩한 사람이 만지고 접촉하는 것마다
부정한 것이 거룩해 지고
더러운 것이 깨끗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스스로 의롭다는 바리새인들이
부정하고 더럽다고 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문화는
병든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성문 밖으로 쫓아내어
그들끼리 따로 모여 살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보기에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부정하다 쫓아내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결함이나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부정한 사람을 멀리하고 쫓아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했던 유대 종교문화는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방법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 좋다고 자랑하는 교인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믿음이나
부족한 신앙생활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종교적 경건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종교적 경건은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해
겉으로 보이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감당하기 힘든 위기와 시련을 만나더라도
절망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능력이
종교적 경건의 본질입니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권고하기를
경건의 모양만 흉내 내는
종교지도자들과 교인들에게 멀어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말 멀리해야 하는 사람은
스스로 경건한(의로운) 척하며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제멋대로 부정하다고 여기는 종교인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멀리해야 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 홈리스, 성소수자, 타종교인 들을
부정하다 따돌리고 비난하고 정죄하므로
자신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종교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믿음은
남들에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 것처럼
흉내 내거나 보이려는 외식으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종교문화와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가장 나쁜 일이 된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부정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에 있지 않고
부정한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에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