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4 화요 아침묵상예수님의 분노

 

 

마가복음 1:40-42 (개역성경)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him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ling," he said. "Be clean!"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유대 종교문화에서 나병(문등병)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병환자를 동정하거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병환자를 본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부정해진다고 믿었기에

나병환자를 보면 돌을 던져 쫓아내는 것이

당시 유대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유대 종교문화 분위기에서

버림받고 쫓겨난 나병 환자가 한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실 마음만 있으시면

자신이 앓는 불치의 병을 치유할 수 있으니

제발 자신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나병환자가

간청하는 것을 보시고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마가복음은 소개하기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민망히 여기사라고 번역했습니다.

 

마가복음 1:41 (개역성경)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마가복음 1:41 (개역개정)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민망히 여기사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한다는 뜻으로

나병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동시에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마가복음 사본에 의하며

민망히 여기사라고 기록되어진 부분이

(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ιζομαι)

분하게 여기사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르기스데이스 όργισθέίς)

 

이 부분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심각한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민망히 여기사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

분하게 여기사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의 좀 더 오래된 사본에는

분하게 여기사라고 기록된 말씀이

민망히 여기사라는 단어로 바뀌게 된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고의로)

예수님의 분노하심을 숨기기 위해서라고

일부 신학자들은 주장합니다.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마가복음을

후대 종교지도자들이 옮겨 기록하면서

(사본을 만들면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표현보다는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을

선호하였기에 본래의 단어가 변경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보시고

단순히 불쌍히 여기셨기 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셨다고 보는 것이

본래 예수님이 느끼셨던 감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전체를 보면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과 종교문화에

끊임없이 분노하였으며 대항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잘못된 믿음과 유대 종교문화에 대한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 11:1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표현은

매우 격렬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저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보시고

단순히 불쌍히 여기셨기 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셨다는 것이

좀 더 예수님의 마음과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보시고

왜 분노에 가득 차셨을까요?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에게 분노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분노는

자신들의 거룩함, 정결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나병에 걸린 불쌍한 사람을

따돌리고, 소외시키고, 쫓아내는

잘못된 믿음과 유대 종교문화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종교인들이

병든 나병환자를 치유하여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돕기보다는

나병환자를 부정하다 쫓아내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분노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분노하셨던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와 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도

여전히 분노하실 것입니다.

 

차별과 분리, 왕따와 소외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우월감과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믿음과 종교문화는

지금도 비슷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약하고, 힘없고,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고, 소망을 주며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목적이며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누가복음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과연 오늘날 교회가

구약성경에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예언하고 있는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분노하심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 장애인들, 타종교인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무시하고, 혐오하는

불의하고 부당한 사회 현상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그냥 지나쳐 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직접 부딪쳐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이런 현상에 대해

불편해 하는 마음, 잘못 되고 있다는 마음은

가져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대한 분노

부당한 일에 대한 분노가 없는 사회는

모두가 불행한 사회가 됩니다.

 

갈수록 교회와 교인들은

부당하고 불의한 일에 예수님이 가지셨던

정당한 분노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당하면,

불같이 분노하면서,

세상의 부당한 일이나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분노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버립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어느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가 하셨던

고백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의 고백인즉

지금까지 자신은 수없이 방송되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한 번도 그들의 처지와 형편에 공감하며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답니다.

그저 남의 일로만 여겼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는데

억울한 일을 당한 자신들이

오히려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 것을 경험하고는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았는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자, 타 종교인 등을

자신들과는 다른 부정한 사람이라고 정죄하므로

자신들의 종교적 거룩함(경건)을 지키려는 것은

악하고 부당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셨던 것처럼

교회와 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와 악에 분노하는 것,

사람을 소외시키는 일에 분노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는 일에 분노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구제나 긍휼 연민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회와 세상의 불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으면

똑같은 (악한) 일들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종교의 이름으로(하나님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정당화하려는

모든 불의한 일과 부당한 종교문화에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는

공의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