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5일 금 아침묵상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마가복음 2:6-7 (표준새번역)

6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할까?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중품병자에게

네가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건과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은

병을 치유하거나 귀신을 쫒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메시아로 오셨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마가복음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죄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게 하심이 아니라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죄인을 용서하는 길 외에는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예수님으로 하여금 용서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몸소 직접 가신 길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용서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으니

두려움이나 불안에 빠져 살지 말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7:36a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그 동네에 사는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바리새인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예수님께 엎드려서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

바리새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예언자(선지자)라고 한다면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 알 텐데,

그렇다면 당연히 여자를 정죄하며 물리쳐야 하는데

왜 예수님은 여인을 물리치지 않는 것일까?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생각하기에는

죄인인 여자는 멀리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그 여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여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48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죄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관점이며 시선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부르며

분노하고 미워하였습니다.

 

누가복음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는 그들을 멀리함으로

자기들은 죄인들과는 다르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하고 드러내는

전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멀리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의로움을

하나님께서도 의롭다고(선하다고) 여기셨을까요?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회칠한 무덤과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강력한 경고와 심각한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태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죄인과 약자를 무시하고 정죄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나쁜 종교적 행위임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목사와 교인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수천 년에 걸쳐 반복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도

제대로 이해하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죄가 없어서 의인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인은

진짜 의인이 아니라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의인이 있다고 한다면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정말 모르는 자들입니다.

 

정말 자기 자신을 안다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100%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행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하고 멀리하고 정죄하며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종교와

 

예수님처럼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고 실수와 잘못이 있더라도

용서와 이해, 긍휼과 격려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신앙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대조적인 두 신앙의 자세와 모습은

마치 지옥과 천국만큼이나 차이가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세상(하나님 나라)

어떤 세상과 사회와 신앙이었을까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고,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 세상과 사회,

 

이런 세상과 사회야말로

사람이 살아갈만한 세상과 사회이며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셨던

세상과 사회 그리고 신앙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길을 보여주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용서가

하나님 나라로 향해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진실과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해,

 

용서하는 자로 오셨고

용서하는 자로 사셨고

용서하는 자로 죽으셨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깨닫고 발견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용서할 줄 아는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