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9일 화 아침묵상율법학자들의 속셈

 

 

마가복음 2:6-7 (표준새번역)

6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할까?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중품병자에게

네가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며 분노했습니다.

 

도대체 율법학자들은 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그토록 심각하게 여기며 분노했을까요?

 

율법학자들의 신앙(생각, 주장)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라는(인자) 예수가

감히 사람의 죄에 대해 용서를 선포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언뜻 꽤 타당해 보이는 주장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속죄 제물을 갖고 성전(성소)에 나가서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 바쳐야만

제사장이 비로소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후

무려 1400년 이상을 지속되어온

확고부동한 종교적 전통이며 의식이었습니다.

 

레위기 4:31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화목제물의 기름기를 떼어 내듯이,

기름기를 모두 떼어 내면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제단에 올려놓고,

주께서 그 향기를 맡고 기뻐하시도록 불살라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이,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용서를 받는다.

 

레위기의 규정처럼

사람이 그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선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죄를 용서해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길 외에는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제사의 율법에 익숙한 율법학자들이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언뜻 그럴듯한 주장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표면적인(드러난) 이유였다면

여기에는 숨겨진 또 다른 속셈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학자들이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에는

숨겨둔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속죄제사가 시작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있으면

사람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 받는 길을 열어 놓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속죄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속죄 제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우치고,

죄는 용서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제사에 대한 율법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종교제도로

변질되었습니다.

 

물론 내세우는 명분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속죄제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 명분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식민지 상황에서도 제사에 대한 율법을 주장한

진짜 중요한 이유는

유대백성들을 지배하는 지배의 도구로

제사제도를 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일종의 탐욕스런 카르텔이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풍병자가

속죄제물을 갖고 온 것도 아니고,

제사장에게 간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전이나 제사장에게 나올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역시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성전의 장사꾼들 또한

먹고 살 길이 막히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은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군림해왔던

종교적 지배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게 되고,

자신들이 생존까지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위기감들이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합심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은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유대백성들을 지배했던

자신들의 (종교)지배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음을

염려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마음이 굳은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사람들은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는 세상권세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종교를 이용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여

종교지도자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시도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저들의 잘못된 탐욕과 시도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시고 책망하시고 비판하셨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한편으론 기독교 신앙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의

심각한 타락과 왜곡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카톨릭)

로마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었기 보다는

로마의 황제 지배체제를

강화시키고 지켜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개신교회(protestant)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신교회의 역사를 보면

북아메리카에서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해 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교회와 목사들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와 목사들은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차별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설교했습니다.

흑인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라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교회와 목사들이

거룩하다는 하나님 말씀으로(성경으로)

백인들의 탐욕을

정당하다고 지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백인들은

흑인들을 무차별 학대하며 노예로 사고팔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입버릇처럼 앞세우지만

속으로는 종교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과 욕심을 채우는 일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이처럼

거의 언제나 타락하고 변질됩니다.

 

처음의 의도나 뜻과는 다르게

자기들의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을 섬기라고 세운

종교 제도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는 일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살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걸어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신 이유도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 이익을 따라

본질을 왜곡하고 흐리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채우는

율법학자,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