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30일 화요일 아침묵상-가룟 유다

 

 

마가복음 3:19 (표준새번역)

예수를 넘겨 준 가룟 유다이다.

and Judas Iscariot, who betrayed him.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70인 제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훗날 예수님을 배반하고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훗날 예수님을 배반했기에

모든 신약성경은

제자들의 명단에서 가룟 유다를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이미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6: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 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6:71

이것은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예수를 넘겨 줄 사람이었다.

 

그러서인지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 안에

가룟 유다가 포함된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뽑으신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의문에 대해

성경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을 근거로 해서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선택하신

가룟 유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비록 예수님께서는

훗날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진정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목사나 교인들 중에는

결과론적인 사고에 집착하여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제자로 삼으신 것을

그의 배신을 이용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은

그의 배신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

즉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리지만

이런 식의 결과론적인 생각은

예수님의 뜻을 매우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이용하시는 분도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시고도

그의 배신을 이용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다면

 

훗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으로 인해

깊은 죄책감에 빠져 자살하게 된 것은

결국 예수님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주의해서 살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운명(예정, 결정)지워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시고

그에게 수차례 경고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이미 예정(결정, 운명)된 것이라고 한다면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경고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경고하신 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부를 때,

단 한 번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사용했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늘 랍비’(선생)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 했지만

결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함이었기 보다는

예수님의 능력과 인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년 품삯)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재정을

관리하였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재정을 관리하면서

제자들 몰래 자기 주머니를 채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를 책망하며 말하기를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좋을 것을

왜 이런 식으로 낭비 하냐고 꾸짖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자신이 빼돌릴 돈에 대한 욕심(속셈)을 감추기 위해

거룩한 명분을 앞세운 것입니다.

 

비슷한 일들이

여전히 교회에서도 반복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거룩한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합니다.

 

말로는, 겉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는

선교를 말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며,

자신들의 욕심(명예, 인기)을 채우려는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이용하고, 공동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다 망했다는 사실을

엄중한 경고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제대로 깨달으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가진 인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과 야망과 비전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용해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권능을 위임받아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능을 위임받아 행했던

가룟 유다가 행한 놀라운 기적도

결국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된 것에 불과합니다.

 

신비롭고 놀라운 기적을 베푼다고

이것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시몬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마태복음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따라서 가룟 유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배신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가룟 유다나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심히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고

예수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경고하셨음에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회개했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며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실수나 실패나 불순종이 없는 완전(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지향점(방향)

어디에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두려움에 빠져 배신하는 것과,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과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

실수하고 실패하거나 배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비록 드러난 결과는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비슷해 보이는

실패와 배신을 하였지만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가룟 유다과 베드로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를 제자로 여기신 것은

그에게 마지막까지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인 동시에 경고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하기에

누구나 신앙에 실패하고 예수님을 배신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깨닫지 못한 가룟 유다가 아니라

실패와 배신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은

베드로와 같은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