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일 수요일 아침묵상-멈추어 서신 예수님

 

 

마가복음 5:35-36 (표준새번역 NIV)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While Jesus was still speaking, some men came

from the house of Jairus, the synagogue ruler. "Your

daughter is dead," they said. "Why bother the

teacher any more?"

36 Ignoring what they said, Jesus told the

synagogue ruler, "Don't be afraid; just believe.“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으로

그의 열두 살 되는 딸을 고치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이셨습니다.

 

그때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을 만져

자신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일분일초가 급하게

서둘러 가는 길이라

그냥 지나치실 만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는

자신의 옷을 만진 여인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는

옷을 만진 여인을 찾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것을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서

옷깃이 스치고 몸이 부딪치는 일은

너무나도 흔한 일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신 것은

너무나 속터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딸의 생명이 위급합니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순간에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는 부정한 여인 때문에

한참의 시간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왜

급하게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는

율법이 부정한 사람이라 정죄하였던 여인을 찾아

시간을 보내신 것일까요?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열두 살 되는 자신이 사랑하는 딸의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 딸의 문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자기 딸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이 다른 사람의 겪는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두 살 된 사랑하는 딸이

병에 걸린 것도 물론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가족들과 마을에서 쫓겨나 혼자 살아야 했던

여인의 아픔과 고통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열두 살 된 회당장의 딸도 소중하지만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온 여인도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

혈루증 걸렸던 여인을 딸아, 부르신 것도

비록 세상은 부정하다고 정죄하는 여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딸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율법이 부정하다 정죄한 이 여인 역시

예수님에게는 회당장의 딸과 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위기나 고통을 겪게 되면

자신이 겪는 고통이 가장 힘든 고통이라 여기거나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만 힘들게 살아간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우리를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려는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위기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이웃을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사인(sign)으로 여길 줄 아는

깨달음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면

나와 비슷한 또는 더 절박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겪어야 하는 위기나 고통은

분명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넘어뜨리게 만드는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인생에서

재앙이나 고난을 만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고

내 인생에 없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지나쳐서

신앙생활이 마치 모든 고난과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피하게 해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심각한 착각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고난이나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의 어떤 인물도

고난이나 역경 또는 재난을 만나지 아니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인생의 고난을 피하게 해주거나

면제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기념하고 기억하고 늘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나 역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고난이나 역경을 피하는 것에 있지 않고

이기는 것에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이나 역경을 이기는 것을 배우기보다

고난이나 역경을 피하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되면

결국 인생의 고난이나 역경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거나 넘어뜨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다는 예수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도전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피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고난을 당당히 맞서 이기고 승리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기치 않는 또는 원하지 않는

고난이나 역경, 위기, 시련 질병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지 아니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이 가지고 오는 변화입니다.

 

고난이 가져오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최악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은

늘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선택에는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이전보다 훨씬 나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이

만들어 내는 양극단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을

인간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며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기치 않은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은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게 하거나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 선택은 결국

우리의 믿음의 크기에 달려져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인생의 고난이나 위기를

피하려고만 하거나 도망하려고만 한다면

결국 그 고난과 위기가 우리를 삼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이나 위기로

이전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피하려 하지 않고 맞서 싸우면

그 고난이나 위기는 오히려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겨납니다.

 

이제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웃의 고통을 함께 공감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일분일초가 급하게 가던 걸음을

의도적으로 멈추신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자신만 힘든 고통을 겪는 것 같았지만

세상에는 자신보다 더 큰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통해

남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라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모든 사람들이 부정하다 정죄하는 여인 역시

예수님에게는 소중한 딸이라는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기도

 

살면서 내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

내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볼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