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일 수요일 아침묵상-달리다굼

 

 

마가복음 5:41-43 (표준새번역 NIV)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41 He took her by the hand and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means, "Little girl, I say to

you, get up!").

42 Immediately the girl stood up and walked

around (she was twelve years old). At this they

were completely astonished.

43 He gave strict orders not to let anyone know

about this, and told them to give her something

to eat.

 

 

예수님께서는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쫓아내시고는

부모와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아이가 죽어있는(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있는(자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는 달리다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자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던 방법은

아이의 손에 예수님의 손을 얹으시고는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셔서

죽은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을

종교용어로 안수(按手)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주는 아니지만

안수하므로(손을 몸에 얹으므로)

병을 치유하거나 축복하는 내용이 가끔 나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유난히 안수기도를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들에 의해

안수기도가 불필요하게 남발되고 있습니다.

 

부흥회 마지막 날이면

부흥사의 안수기도가 빠지지 않습니다.

송구영신예배 때마다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줄을 늘어섭니다.

 

지나치게 안수기도에 의존하는

교인들의 신앙도 문제지만

목사들의 안수기도에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교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을 하거나 치유를 한 경우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손을 엇갈려 얹어 축복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48:14

이스라엘(야곱)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이 경우도 둘째 에브라임이

장자인 므낫세보다 앞으로 더 큰 자가되고

더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할 때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동물)의 머리 밖에는 없습니다.

 

레위기 3:8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29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율법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라고 한 이유는

사람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켜

사람의 죄를 대신해 속죄(희생)를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오랜 유대종교문화의 전통은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 속죄하게 하는 의미이지

치유나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제자들 역시

단 한 번도 사람의 머리에 손은 얹는

안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적 근거나 유래가 전혀 없는

머리에 손은 얹는 안수기도가

유난히 한국교회에서만 남발되는 이유는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머리에 손은 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생각과 몸을

지배하거나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아이를 살린다고

비록 아이라고 할지라도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머리에 손은 얹는 안수기도를 남발하는 것은

교인들에 대한 축복이나 치유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영적권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일부 목사들은

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핑계로

마치 스치듯이 또는 때리듯이

교인들의 머리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안수를

아예 대놓고 왜곡하는 나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거나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의 안타까운 형편을 충분히 들어주시고

저들의 안타까운 형편에 마음 깊이 공감하시고

저들을 진심으로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얹어(머리가 절대로 아님) 기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리다굼(탈리타 쿰)’이라는 말은 아람어로

소녀라는 뜻의 탈리타

일어나라는 뜻의 을 합친 말입니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대단히 특별한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에서 아침마다 부모가

자신의 딸을 깨울 때 흔하게 사용하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곡하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자는 아이를 깨우는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죽은 아이를 깨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비한 방언이나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말로

죽은 아이를 깨우지(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같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평범한 말로

죽은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기원후 600년 무렵까지

고대 중동 지방의 국제어 사용되었던 언어입니다.

 

앗시리아, 신바벨로니아, 페르시아 등

이스라엘을 점령하였던 제국들에서도

아람어가 국제적인 공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 역시 아람어 일상생활 언어로

사용하였습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의견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당시 평범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자는) 아이를 깨우신 방법은

긍휼한 마음으로 손을 잡으시고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로

죽은 아이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중요한 것은 안수기도도 신비한 말(방언)도 아닌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이를 살리신 것입니다.

 

지난 아침묵상에서도 설명을 했지만

마가복음 435절부터 543절까지

연속되는 예수님의 네 가지 이적 사건을 소개하지만

결코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이 초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서로 다른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4: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할까?" 하였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으로

마가는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야이로 딸의 죽음을 다스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큰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고 있다고 해도,

군대 귀신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혈루증이라는 부정한 병이 우리를 괴롭히고

마침내 죽음이 우리를 삼킬지라도

 

이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에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현실이 어둡고 절망적이어도,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에

불안해하거나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같은 절망과 낙심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오늘의 기도

 

그 어떤 악한 권세도 심지어 죽음의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막지 못함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