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일 화요일 아침묵상-세례요한과 헤로디아

 

 

마가복음 6:17-29 (표준새번역)

17 헤롯은 요한을 잡아 오게 하여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헤롯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18 요한이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은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하였다.

23 그리고 그 소녀에게 굳게 맹세하기를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하였다.

24 소녀가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침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25 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곧바로 이 자리에게 침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소녀가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시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시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28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하였다.

 

 

세례 요한과 헤로디아의 관계는

구약의 엘리야와 이세벨의 관계를떠오르게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 선지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마태복음 11:12-14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환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엘리야와 비슷한

사역(활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악한 왕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하며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왕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의 배후에는

이방인 아내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과 결혼하며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에 가져와서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스라엘 정치권력의 부패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타락이 가장 심각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가장 혼탁하고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영적 타락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단호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엘리야 선지자 혼자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맞서 싸운 일입니다.

 

갈멜산에서의 영적 싸움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죽게 되자

이세벨은 자신이 믿는 바알과 아세라의 이름을 걸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열왕기상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물론 엘리야를 죽이려는

이세벨을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에 대한 헤롯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약 시대의 엘리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례 요한을 죽이는 일에 성공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이세벨보다 헤로디아가 얼마나 더

비정하고 잔혹하고 간교한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가

자신의 딸 살로메를 이용하면서까지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이

자신의 숨겨진 탐욕을 세상에 드러내어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이루는 일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가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한 유일한 이유는

헤롯 안티파스의 권력과 부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헤롯 역시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을 한 이유는

헤로디아의 가문과 결혼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권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은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략적이며 탐욕적인 결혼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당한 결혼을 비판하였고

헤로디아는 자신의 탐욕을 비판하는

세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세례 요한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헤롯과 헤로디아는 왜

예수님께서 인정한 당대 최고의 의인이라는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말씀 보다는

자신들의 욕심과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탐욕스런 인간의 실체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목사와 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게 해주는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목사와 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진리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목사와 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알량한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을 앞세웁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자신들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리를 함부로 왜곡하고 옳고 그름을 바꾸며

선악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부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마가복음 10: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것이 부와 가난에 대한

확고부동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인들은

부와 가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습니까?

 

내가 부자가 되어서,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우며 살면 된다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교인들이

부에 대해,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심지어 큰 부자가 되거나,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매우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은 온통

돈을 사랑하는 자로 있으면서도

 

돈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돈에 대한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감추려고 하는

이중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란

부자가 되어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란

가난한 자의 자리에 가는 것,

가난한 자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란

가난의 불편함에 주눅 들지 않고,

이미 가진 것으로도 불편해 하지 않고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돈이 없어서 불편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불편한 삶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욕망과 욕심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서

내가 정말 간절히 욕심내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내면의 욕망과 욕심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 있는지를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내면에 가득 찬 욕망과 욕심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더 이상 스스로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욕망과 욕심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것임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감추려고만 했고

자신이 더러운 욕망을 고발하는 세례 요한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내 소원을 이루지 못해서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해서

불행한 인생을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