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금요일 아침묵상-부자와 낙타의 비유
마가복음 10:23-26 (표준새번역, NIV)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26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가? 라며
수근 거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오늘 우리 대부분에게도
여전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선포가 아니라 비유의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라면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사건이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비유하신 것은 아니라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문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는
바늘귀라고 불리는 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늘귀로 불리는 문은 주로
야간에 통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으로
사람들이 겨우 통행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이었습니다.
한 밤 중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반드시 바늘귀라는 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찾았던 사람들 중에는
낙타에 많은 짐을 싣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낙타는
사람을 태우거나 많은 짐을 운반하는
가장 효율적인 교통수단이었습니다.
낙타의 키는 2미터가 넘었으며
힘이 엄청나게 세서
꽤 많은 짐을 싣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낙타를 데리고
한 밤 중에 바늘귀라는 성문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낙타가 짊어진 모든 짐을 내려놓고
엎드려 무릎을 꿇고 기어가야만
낙타는 비로소 바늘귀라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라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자신의 등에 짊어진 모든 짐을 내려놓고
기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물은
부자 청년이 정말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재물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청년과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던 부자 청년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놀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유대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많은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두 부자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재물과 부에 대한 약속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난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에 의하면
부는 은혜와 축복의 상징이고,
가난은 징벌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 서 본다면
살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가난한 사람은
더 더욱 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제자들이 놀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믿음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대부분 교인들의 실수이며 착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들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이 가진 관점에서 듣게 되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생을 얻는 길을 찾았음에도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청년은
왜 순종할 수 없었습니까?
마가복음 10: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기에는
자신이 가진 재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자신이 가진 그 많은 재물은
그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답을 얻었음에도
그대로 실행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많은 재물은
도무지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 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많은 재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라
영생을 가로막는 방애물이 되었습니다.
돈이 너무 없어
지나치게 가난한 것도 문제이지만
가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나친 부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 합니다.
돈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무엇이 나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을 돈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치와 낭비를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넘어선 많은 물질은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이며 사명이며 세상을 향한 책임입니다.
필요를 넘어선 돈은
절대로 우리를 잘 살게 하지 못합니다.
사치와 낭비를 하게 만듭니다.
사치와 낭비는
우리를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못사는 사람으로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사치와 낭비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필요 이상을 욕심내는 순간부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필요 이상의 돈에 욕심을 내다보니
돈보다 중요한 건강을 상하게 합니다.
필요 이상의 돈에 욕심을 내다보니
가족들 간에 우애와 화목도 사라집니다.
친구들과의 우정에도 금이 갑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사실은
필요 이상의 돈에 욕심을 내다보니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재물을
인생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결코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주 아침묵상은 여기까지입니다.
한 주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가는 길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
돌아볼 수 있는 주일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남들보다 더 많은 재물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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