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금요일 아침묵상–세리와 죄인들
마가복음 2:15-17 (표준새번역)
15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5 While Jesus was having dinner at Levi'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eating with him and his disciples, for there were many who followed him.
16 When the teachers of the law who were Pharisees saw him eating with the "sinners" and tax collectors,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17 On hearing this, Jesus said to them,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오늘은 2016년 7월 21일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보내드렸던 아침묵상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들의 대명사처럼 여겼던
세리였던 레위(마태)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세리라고 하면 상종도 하지 않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문화였는데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왜
당시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증오를 감수하면서까지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이 질문에 초점을 두고 과연 내 신앙은
자기 객관화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며 그저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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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레위(마태)를 제자로 삼으시고는
레위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레위의 집에는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여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수님을 따라 나서려는 레위(마태)에 대한
송별회와 같은 모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본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을 수 있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2:16 (개역개정)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어제 아침묵상에서도 잠깐 설명했지만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를 보면
세리와 죄인들 또는 죄인과 세리들은
늘 한 묶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동격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세리(tax collector)는
한 마디로 세금을 걷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를 통치했던 로마는
로마인들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고
현지 유대인들을 고용하여 세금을 걷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고용된 현지 유대인 세리들에게는
1년 동안 로마에 납부해야 할 세금이 정해져 있었고
로마로부터 별다른 임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당시 유대인 세리들은
로마에 납부해야 할 할당량을 채우기만 하면
거두어 드린 나머지 세금은
모두 자신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자신의 돈으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 세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하면서까지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두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당시 세리들은 유대 사회에서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는
나라와 동족을 배반한 자들이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모든 세리들이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서는
당시 세리들은 그들이 가진 직업으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세리와 함께 한 묶음으로 여겼던
죄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죄인들”은
흉악한 죄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법이 정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실정법에 의한 죄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나 기타 서신에서 표현한 것처럼
신학적인 또는 교리적인 차원에서의
죄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반면에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죄인들이라는 표현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이 해석한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이
율법의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는
일반 유대백성들을 “죄인들”이라고 부름으로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의인으로 여긴 것 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신체적 장애가 없이 태어난 사람들이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비 정상인이라고 부르므로
스스로를 정상인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정상이다 비정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교만과 어리석음을 넘어서는 악한 일입니다.
이처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여겼고
자신들처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다른 평범한 유대 사람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은 의인이고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여겼기에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정죄함으로 인해
바리새파 사람들만 보면 주눅이 들었고
스스로 죄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리에 대한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10-13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성전 앞쪽으로 나아가서는
성전 뒤쪽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반면에 세리는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고백하며
차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만 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분명하고도 명확한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지금도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바리새인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여전히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과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객관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좀 오래 다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하는 종교적 행위를
신앙과 믿음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는 옳은 일이고
자기가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자기 합리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합리화 정도에서 멈추면 다행인데
자기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자기가 십일조 헌금을 하면,
십일조 헌금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믿음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기가 새벽기도 하면
새벽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신실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기가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면,
교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깁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확하게 십일조를 구별하고,
새벽마다 교회를 찾아 기도를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왕이면 안 하는 것보다야
할 수만 있다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영적성숙을 위한 것이지
남과 비교하거나
남을 판단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잘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차라리 안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행위를 기준 삼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나 구원도 필요 없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객관화와 성찰을 하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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