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 화요일 아침묵상-회당장 야이로
마가복음 5:21-23 (표준새번역 NIV)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계셨는데,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3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1 When Jesus had again crossed over by boat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a large crowd gathered
around him while he was by the lake.
22 Then one of the synagogue rulers, named Jairus,
came there. Seeing Jesus, he fell at his feet
23 and pleaded earnestly with him, "My little
daughter is dying. Please come and put your hands
on her so that she will be healed and live."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하고 무시당하였던 예수님에게
회당장이라는 유대 종교 지도자가
찾아와서는 엎드렸습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배척하고 무시하였던 예수님에게
회당장 야이로라는 종교 지도자가
엎드린 이유에 초점을 두고
묵상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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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동쪽에 있는 거라사 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서는
군대 귀신을 이천 마리 돼지 떼와 함께
바다에 빠뜨려 완전히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라사 지역 사람들에게는
군대 귀신이 사라진 것보다
이천 마리 돼지 떼가 죽은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기 마을을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말이 간청이고 부탁이지
예수님을 쫓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거라사 지역에서 큰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리 바다를 맞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그 지역의 문제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만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탐심, 이기심, 물질, 돈이라는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이웃의 회복과 치유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상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악한 영(세력)에서 벗어나
자유(구원)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의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거부하며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거라사 지역 사람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갈릴리 바다 건너오시자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갑자기 한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회당이란
법궤를 모신 성전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성전과 회당의 차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 밖에 없었으며
성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동물)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이 단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은
성전을 만들게(건축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성전은 오직 하나만 필요했습니다.
성전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으로 제한되었습니다.
반면에 회당은 지역마다
여러 군데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5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했으며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지역을 지나는 랍비가 방문하여
지역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배웠기에
사소한 일의 시시비비를 판단하는
재판소의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회당은 10가정이 모이면 조직이 가능했고
최소한 3명의 장로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장로 중에서 회당의 최고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이렇게 뽑힌 사람을 회당장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의 타락과 부패가
너무 심각해서 유대 백성들은 성전 보다는
회당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시던 때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성전중심의 신앙에서 회당중심의 신앙으로
옮겨가는 시기였습니다.
회당은 지금으로 치면 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가끔가다 지금의 교회를
성전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하고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쯤으로 여기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매우 심각한 교회에 대한 왜곡입니다.
굳이 교회의 구약 전통을 따진다면
교회는 성전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회당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굳이 따진다면 목사는
제사장이기보다는 회당장쯤으로 여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지역의 회당장은
제사장만큼의 부와 권세와는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지역에서는 지역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고 신뢰받던 종교 지도자였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이 병에 걸렸으니까
별별 수단을 다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돈과 지위를 다 사용해서
딸을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딸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자
회당장 야이로가 마지막 소망을 예수께 걸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모습을 본
그 지역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들에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그 지역 최고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린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일수 있겠지만
만약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에게 죽을병이 걸려
온갖 수단 방법을 써도 낫지 않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딸이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사랑하는 딸이 겪는 병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겠습니까?
예수님에게 나왔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비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 지역 최고의 종교지도자 였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엎드린 사건이 주는
영적 도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회당장과 마찬가지로 우리 중에도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고통과 문제가 없었다면,
도무지 예수님께 나오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인생에 닥친 감당하기 힘든 고통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자기 인생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그랬던 사람입니다.
자기 위치나 사회적 체면을 따지면
도저히 예수님께 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지위라는 장벽이 있었고
그에게는 체면이라는 장벽이 있었고
다른 사람의 보는 눈이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권위와 체면이라는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딸의 죽게 된 위기와
이것을 도저히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고통이나 위기를
자신을 둘러싼 장벽을 뛰어넘게 만드는
야이로와 같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고통이나 위기를 만나거나 겪을 때
왜 이런 고통이 왔는지
그 원인(이유)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원인을 바꾸거나 고쳐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또한 원인(이유)을 따지고 찾는 것이
불가능한 또는 소용이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게 닥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고 극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아이들이 꽃다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인간의 실수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원인을 반드시 규명하고 고쳐야
비슷한 일이 반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지혜입니다.
반면에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유전적인 문제로 인해 병에 걸린 것은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이나 위기로 여기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견디고 치유하고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이
믿음이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믿음이고 지혜입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문제나 위기로 인해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의 고통과 위기는
한 고비 넘었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살아가는 내내
또 다른 고통과 위기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당장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언제 넓어졌습니까?
이제까지 한 번도 안 해 보았던 일을 해 보고
이제까지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던 사람을 접촉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기도할 때가 언제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엎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딸의 문제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겸손이 곧 믿음입니다.
겸손이 생명입니다.
겸손이 살길입니다.
예수님께 나오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체면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게 하시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함으로
우리의 지경과 관계를 넓히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