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수요일 아침묵상-산을 내려오라
마가복음 9:9-10 (표준새번역, NIV)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서로 물었다.
9 As they were coming down the mountain, Jesus gave them orders not to tell anyone what they had seen until the Son of Man had risen from the dead.
10 They kept the matter to themselves, discussing what "rising from the dead" meant.
기독교 신앙을 통해
초현실적인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는 것은
현실의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 체험의 본질은
신비한 체험 자체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초현실적인 모든 영적 체험은
세상의 질서와 방식에
얽매여 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현실의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와 방식의 삶이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서는
도무지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하는 수단으로만
그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비한 체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체험을 통해
현실의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는
영성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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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광채(빛)가 나는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양편으로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광경을 본 베드로는
너무나 신비하고 놀라운 사건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천막을 세 개 만들고 산에서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산 정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시간이 되고 때가 되면
내려와야 합니다.
저들이 올라간 산은
내려오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지
거기서 살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냥 내려와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가지고
내려오느냐가 중요합니다.
산 위에서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신비한 모습으로 변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경험한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9:8
그들이 바로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기독교 신앙은
신비의 세계이며 초월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종종 신비한 체험이나 초월적인 체험이
신앙생활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비한 체험이나 초월적인 체험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물론 이왕이면
신비한 영적 체험이, 초월적인 체험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비한 영적 체험이 없다고
믿음이 없다고 하거나,
신비한 영적 체험을 경험한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믿음이 작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비한 영적체험이 없음에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신비하고 놀라운 영적체험에만
의존하는 신앙을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신비하고 초월적인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을 신비와 초월로만 설명하는
신비주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신비주의 신앙은
결코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비로운 체험과 초월적인 체험이
비록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확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장점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신비주의에 빠진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신앙을
가지게 만듭니다.
자신이 경험한 영적체험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신이 경험한 영적체험을
절대화 시킵니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영적체험을 경험하지 못한 신앙인들은
모두 가짜 신앙인이라 매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한국의 일부교회가 주장하는
방언의 은사입니다.
방언은 분명 기독교 신앙의
신비로운 체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은사는
사람마다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만을
구원 받은 사람의
유일한 증거로 삼는다든지,
방언의 은사만을
성령의 체험의
유일한 증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방언이라는 영적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강요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강제로 가르치거나
강요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여
유치한 방법으로 방언을 가르쳐주고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교인들을 미혹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른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결코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영적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배우고 따르는 일에 더욱 열심을 다합니다.
또한 신비주의에 빠진 신앙은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성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죽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 세 개를 짓고는
여기에 살자고 했던 것과
비슷한 일들이 교인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역해야 할 것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사역해야 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교인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과 일터가 되어야 합니다.
신비한 체험이 너무 좋다고
동일한 체험만을
자꾸만 반복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신비한 영적 체험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더 뜨겁고, 자극적인 영적체험을 찾아
신비한 은사가 나타나는
이상한 교회나 기도원들을 찾아다닙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신앙의 왜곡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신비한 영적체험을 경험하도록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신비한 영적체험을 경험하게 하시거나
사람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경험하여
제자로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이루어 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변하신 산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내려오신 것처럼
가정으로 직장으로 일터로
내 삶의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 하며
복음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예수님의 세 제자들이 경험한
신비하고 초월적인 영적 체험이 있는
예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경험한 영적 체험을 가지고
내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남겨놓고
자기 혼자만
삶의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 만난 하나님
기도를 통해 만난 예수님
찬양을 통해 만난 성령님과 함께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고난과 비난이 기다리는
세상의 한 가운데로, 현실 한 가운데로
오직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으로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일터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사역의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