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주일예배 - 할 수 있음의 신앙
마태복음 12장 1-8절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 At that time Jesus went through the grainfields on the Sabbath. His disciples were hungry and began to pick some heads of grain and eat them.
2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said to him, "Look! Your disciples are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3 He answered, "Haven't you read what David did when he and his companions were hungry?
4 He entered the house of God, and he and his companions ate the consecrated bread--which was not lawful for them to do, but only for the priests.
5 Or haven't you read in the Law that on the Sabbath the priests in the temple desecrate the day and yet are innocent?
6 I tell you that one greater than the temple is here.
7 If you had known what these words mean,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you would not have condemned the innocent.
8 For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밀밭을 지나가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간의 밀 이삭을
손으로 잘랐습니다.
아마도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따지듯
항의하며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따지듯 물었던
안식일에 제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남의 밀밭에서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배고픈 사람이 남의 곡식밭에 들어가
도구(낫)가 아닌 맨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율법은 굶주린(배고픈) 사람이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웃의 곡식밭에서
곡식을 손으로 따 먹는 것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땀 흘려 농사를 한 것을
지나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굶주림을 채우는 것 이상의 절취는
율법으로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가르치셨으며
동시에 개인의 권리도
인정하고 보호하셨습니다.
따라서 굶주렸던 제자들이
남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문제 삼은 것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6: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제자들의 행동은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일에는 타작을 금지한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의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정한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기셨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다고
제자들을 고발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웅처럼 여기는
다윗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하 21장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급하게 성소가 있는 곳으로 도망칩니다.
급하게 도망하느라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다윗은
성소가 있는 놉까지 도망하는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습니다.
며칠을 굶주린 다윗은
성소에 도착하자마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지금 당장은
마땅히 먹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직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금요일 저녁부터 일주일간이나
제단에 올려 졌던 진설병이라는
빵만 있다고 합니다.
제단에 올려 졌던
진설병이라는 빵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이었습니다.
진설병이란 빵은
아무나 함부로 달라고 해서도 안 되고,
달란다고 아무에게나 주어서도 안 되는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던 다윗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다고 율법이 규정한
거룩하다는 진설병이라도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어야 합니까?
아니면 결코 주지 말아야 합니까?
이것을 지금의 경우로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위해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 났습니다.
그런데 굶주린 홈리스가 와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장 교회에는 성찬에 쓸
빵과 포도주 밖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린 홈리스에게
성찬예식을 위해 준비한
빵과 포도주를 주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달라고 하는 다윗의 모습은
성찬예식을 위해 준비한
빵과 포도주를 달라고 하는 홈리스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굶주린 다윗의 간절한 요청에
제사장 아히멜렉은
율법이 금지한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성소에서
거룩한 빵을 달라는 다윗이나
그 빵을 주는 제사장 아히멜렉의 모습에서
율법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영적자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종교적 규정이나 형식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질서이며 무례함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규정이나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거나 무시하면서까지
종교적 규정이나 형식을
지키려고 하는 것 역시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제한(규정) 된 떡입니다.
왜 이런 규정이 생겼을까요?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용도가 끝났다고 함부로 버리거나
함부로 다루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제단에서 사용하고 난
진설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함부로 다루지 않고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의 규정이
진설병을 아무나 먹지 못하도록
제한한다고 해서
굶주린 사람의 배고픔까지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인 형식이나 관습
또는 전통을 무시하자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무너지면
교회는 거룩함이나 경건함이 없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얽매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 교회는 죽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형식이나 규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다윗이나 제사장 아히멜렉은
종교적 규정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에
그 신앙의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성소에서 식량을 구하고
제사장 아히멜렉은 굶주린 다윗에게
진설병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전통과 형식, 율법과 복음,
교리와 같은 것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얽매어
신앙이 주는 자유함을 잃어버린다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안식일을 주신 것은
자유와 구원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얽매어 속박하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앙을 통해
자유 함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속박 당함을 느끼십니까?
성경은 가르치기를
신앙은 근본적으로
자유 함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느끼는 자유만큼이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고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입니다.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교인들을 향해
세뇌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생각이나 이성을 억압하고
세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하게 합니다.
특별히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가치관이나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과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을 가지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세상에 속하였을 때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앙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것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교인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것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일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더욱 많아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을 통해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는 사람은
당연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신앙인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진 사람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혼에 행복이 달려져 있습니다.
결혼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도 말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결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사랑이 식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져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부부관계에 사랑이 빠지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부담스런 책임과 의무
그리고 속박 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해도 결혼하기 전보다
더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배우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이전보다 더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부담스럽고 힘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규정과 교리에 얽매이면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것만 많아집니다.
하지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집중하면
하나님 말씀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이란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하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고발하는
스스로 거룩하다는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이것은 곧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느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요즘 식으로 한다면,
교회가 사람을 위해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느냐? 는
질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복잡해 보이는 율법의 규정들은
사람들의 삶을 속박하고
억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고
무엇을 금지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할 수 없는 일만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누리는 자유가
반드시 더 커지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 눈이 내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렸습니다.
오늘 저녁에 또 내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날씨도 추워
내린 눈이 녹기는커녕 얼어버려
운전하고 다니기에는
위험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교회가 기상문제로
교회건물을 Close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저의 집에서
모일 수 있는 분들만이라도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전, 눈이 많이 내렸을 때에도
눈길을 헤치고 저희 집으로
오실 수 있는 분들이 함께모여
예배를 드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실 수 있는 분들만이라도
저희 집으로 오셔서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모든 분들이 각자 가정에서 안전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무지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하지 않았던
놀라운 생각의 변화가
저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선
그까짓 미끄러운 눈길이
대수냐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주일예배 역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운전하는 길은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나는 것쯤이야
하나님께서 능히 보호해 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하며
예배에 목숨을 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 인생과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고의 목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 할수록
지금까지 저의 이런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보다는
자기 확신이나 신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인생과 신앙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
예배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러 가지 수단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말씀은 대단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제사를
요즘으로 하면 예배를
가장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아는 것입니다.
눈 때문에 교회에서 모이는
주일예배를 취소하고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금까지 50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25년 동안 목회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방식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너무 자주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꽉 막힌 신앙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형식에
목숨을 걸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일에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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