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 화요일 아침묵상-용서를 위한 기도
마태복음 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께 지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받는 문제는
“좋은 게 좋으니 그저 용서하라”든지
“용서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는 차원의
단순한 도적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용서하고 용서받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용서)을
받는 것에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용서하고 용서를 받는 문제는
단순히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는
절박하고 절실한 영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너무 단순하고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단순하고 평범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으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연약하기에
늘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한 점 오류 없이 완벽한 것은
세상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 종교, 교육, 국가 등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들은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특별히 가난한 자, 소수자들,
기득권에서 벗어난 힘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폭력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여기에는 기독교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친구, 동료, 가족과 같은
매우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 속에서도
인간은 잘못을 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돌이킬 수 있는 잘못이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든,
또는 그것이
큰 잘못이든, 작은 잘못이든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용서받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국적, 종교, 문화, 성별, 나이,
학력, 직업 등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잘못에 대해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결국 인간이란 누구나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
씨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용서받고 용서하는 문제는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와 함께
우리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우리의 몸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우리의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1-35 참조)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어떤 왕이 자신의 종들과
회계 결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산을 하는 중
한 종이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debt)을
왕에게 갚아야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6십억 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원화로 따지면
7조가 넘는 돈입니다.
당시 로마가 일 년 동안
유대 땅 전체에서 거두어 드린 세금이
800달란트였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는 당시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었습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지은 종이
왕에게 엎드려 자비를 구합니다.
시간을 주면 갚을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합니다.
종의 부탁처럼 시간을 주면
왕에게 빚진 일만 달란트를
종이 갚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주어도
왕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라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종이 빚진 것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을
상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은 종에게
아무리 많은 시간을 주어도
종이 그 빚을 갚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비를 구하는 종에게
그 사람이 진 모든 빚을
탕감해 줍니다.
탕감은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빚이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탕감은 더 이상 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종은 그저 시간을 더 주면
반드시 빚을 갚겠다고 했지만
왕은 종이 도저히 기대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예수님의 비유는
용서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값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갚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지은 죄의 값을 치룰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 값(죄의 빚)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길 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왕에게 용서를 받은 종이
집으로 가던 중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동료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멱살을 붙잡고는
자신에게 빚진 것을
빨리 갚으라고 재촉을 합니다.
동료가 조금만 참아주게
그러면 내가 빚을 갚겠다며 애원을 합니다.
하지만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신의 친구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왕에게까지 들려지게 됩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은
종을 괘심하게 여깁니다.
종을 불러다 꾸짖고는
왕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명령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까?
자신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갚아야 할 것에 비하면
도무지 비교할 수도 없는
적은 것을 빚진 자신의 동료를
용서해 주지 못했을까요?
종은 자신이 왕에게 용서받는 것과
자신이 자기 동료를 용서하는 것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의 뜻은
종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왕이 종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용서해 준 것은
종으로 하여금
그의 동료이자 왕의 또 다른 백성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사함에 대한 생각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의 생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를 받는 것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여깁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그 어떤 죄라도 고백하기만 하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내가 어떤 큰 죄를 지었든 간에
용서를 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실수나 잘못을 하고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여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절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용서를 받는 것과 용서를 해 주는 것은
절대로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용서를 받는 것과 용서를 해 주는 것은
늘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지으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은 매우 세심한 주의와
이해가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자신이 빚진 일만 달란트를
갚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의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이미 우리가 받은 더 큰 용서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착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좋은 인격이 있다고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누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께 지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때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날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처럼
동시에 우리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람에게 용서받는 일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어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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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