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일 목요 아침묵상-용서하지 않는 이유

 

마태복음 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진리입니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존경받는 사람도

완벽한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완벽하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 사람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상처를 주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상처받고 피해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단 하루도 완전한 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처럼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 역시

단 하루도 빠질 수 없는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지 않고는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평화와 평안을 누리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가족, 친구, 이웃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죄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전(prescription)

용서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상한 감정과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확실한 영적원리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망가지고 깨진 인간관계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유일한 영적원리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죄로 인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영적원리입니다.

 

용서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할 방법이 없습니다.

 

용서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용서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길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용서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용서라는

예수님(하나님)의 처방(prescription)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기도가

용서에 관한 기도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용서는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없습니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의 방식이 훨씬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에는

보복이나 복수에 관한 문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통쾌한 복수가 펼쳐지는

드라마나 영화는

늘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기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자신의 보복 심리를

보상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차마 시도하지 못하는

자신의 보복 심리에 대해

대리만족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삶의 원리와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capitalism)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경제 원리 중 하나는

누구에게 손해를 입히면

손해를 입힌 만큼 보상을 해 주어야 하고

누구에게 손해를 받으면

받은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다 보니

용서는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사회적인 행위처럼 여겨집니다.

 

나아가 이런 생각들이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이 되었기에

용서가 치유와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영적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용서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하면

용서하는 나만 손해를 보고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죄를 범한 사람은

오히려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고

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손익 계산이

용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용서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은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용서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왜

용서를 받는 사람보다

용서를 하는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까?


용서 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서

같은 상처를 다시 받지 않으려고

용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용서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같은 사람에게서 비슷한 상처를

또 다시 받지 않기 위해

용서를 안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자신이 스스로 붙잡고서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므로 인해

상대방에게서 상처받은 것은 한 번인데

내가 받은 상처를 곱씹으며

내가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나,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보다

우리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무조건 참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위이며

그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 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잘못된 행위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노가

잘못된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잘못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저지른

우리의 실수나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를 하는 것은

잘못한 일이나 말을 없던 일로 여기고

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처를 받은 사람만 힘들어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남에게 준 상처나 죄보다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죄책감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맞는 놈은 두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

속담이 있습니다.

 

데이빗 벨굼 박사는

자신의 저서 죄책감이라는 책에서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가운데 75%

정서적인 문제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남에게 죄를 짓거나 상처를 주고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양심에 화인(stigma)을 맞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이런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심의 화인을 맞았으니

이 사람이 무엇으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하나님의 영적원리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따른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용서하며 살지 못할까요?

 

착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우리 인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서일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는 인격이 훌륭하기에,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으로만 되는 사건입니다.

 

용서가 곧 믿음이며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에 대해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인격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지극히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데다 탐욕스럽기까지 한 우리는

오늘 하루도 만나는 사람들과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상처를 받기만 하고

상처를 주지는 않는 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탐욕스러운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오늘 하루도 불완전한 우리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하나님과 화평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도우시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www.jayoochurch.com

jayooc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