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1:1-4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As he looked up, Jesus saw the rich putting their gifts into the temple treasury.
2 He also saw a poor widow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3 "I tell you the truth," he said, "this poor 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s.
4 All these people gave their gifts out of their wealth;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all she had to live on."
오래전 한국에서
전도사로 사역했었던 교회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사역했던 그 교회에는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혼자서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마침 당시 그 교회는
교회 건물 리모델링을 결정하고는
리모델링을 위해 꽤 많은
공사금액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교회에 부흥사가 와서는
교인들에게 교회 리모델링을 위한
작정 헌금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혼자만 열심히 교회를 다니시던
신실한 여자 집사님은
자신의 가난한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이 약정하는 것을 보고는
천만 원을 약정했습니다.
부자들에게 천만 원은
별거 아닌 적은 돈일 수 있지만
가난한 여자 집사님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고
교회는 교인들이 약정한 헌금을
빨리 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침 여자 집사님 집에는
실직한 남편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땅을 팔아 모아 둔
천만 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부부에게 천만 원은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실한 여자 집사님은
때마침 자신의 가정에 천만 원이 생긴 것은
자신이 약정한 헌금을 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돈이라 믿었습니다.
결국, 여자 집사님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남편 모르게
이 돈을 모두 건축 헌금으로
교회에 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아내에게 헌금한 돈을 찾아오라고
난리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그럴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남편이 교회를 찾아가서는
오백만 원이라도 돌려 달라고
난리를 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그 교회는
이미 리모델링 비용으로 다 썼다며
조금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병이 난 남편은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하다가
끝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는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헌금에 대한
목사와 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에 대한 잘못된 신앙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을 들라고 하면,
힘에 부치는 많은 헌금이야말로
정성스러운 헌금이라고 여기며,
정성스러운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정성스러운 헌금이
더 큰 복을 내려 줄 것이라는 믿음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제물만 바라는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성모독이자 우상숭배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아마도 신약 성경의 여러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그 본질이 왜곡되어
잘못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려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이 부분만 따로 떼어 읽으면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친
가난한 과부의 헌신과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에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과 믿음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부추겼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부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아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께 더 많은 제물과 헌금을
드렸기 때문이라 가르쳤습니다.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종교지도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우쭐하면서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성전에 더 많은 헌금을 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대로
자신들도 부자들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또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정으로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이유로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성전 헌금함에 다 넣은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성전 헌금함에 넣은 두 렙돈은
당장 필요 없는 여윳돈이 아니라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비였습니다.
누가복음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가난한 과부가
성전 헌금함에 넣은 두 렙돈은
당시 시세로 한다고 해도
한 끼 식삿값이나 겨우 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렙돈은 그리스(헬라) 동전으로
그리스의 동전 가운데
가장 적은 액수의 동전이었습니다.
미국 동전 쿼터나
한국 동전 오백 원짜리 같은
아주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두 렙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겨우 한 주먹의 곡식 가루입니다.
한 주먹의 곡식 가루는
가난한 과부의 하루 식사를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적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하루 식사를 해결할
두 렙돈 전부를
성전 헌금함에 다 넣은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성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과 설교는 이렇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부자의 헌금이 훨씬 더 많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과부가 훨씬 더 많은 헌금을 한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산 가운데
아주 적은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모두 드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던
과부의 헌신과 믿음에 대해 칭찬하셨다고
해석하고 설교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과 적용은
예수님께서 본래 말씀하신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정반대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하신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어떻게
가난한 과부의 가신(재산)까지 빼앗는지를
예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0: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이용해서는
과부들에게 남겨진 적은 재산조차도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성전 헌금함에 넣은 두 렙돈은
누구에게로 갔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하나님께 가지 않고
성전을 관리하는 다스리는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수중에
모두 들어갔습니다.
물론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가난한 과부의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시기보다는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셨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넣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믿는 헌금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수단도 아니며
하나님께 더 큰 복을 받는 통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헌금의 본질이며
헌금을 드리는 바른 태도입니다.
【오늘의 기도】
희생과 헌신의 마음으로 드린 헌금이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이루어 가는
은혜롭고 선한 물질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