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목요일-전도자의 탄식에 감춰진 하나님의 음성
전도서 4:2-3
전4: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전4: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1. 전도서 4장은 전도자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바라본 세상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2. 전도자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서 학대받아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많지만,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비정한 현실이었습니다.
3. 전4: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4. 학대를 받지만, 위로자도 없는 비정한 현실을 바라본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들보다 차라리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이 더 복 있다며 탄식합니다.
5. 전4: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6. 심지어 전도자는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아 해 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정한 현실을 보지 않는 자들이 더 복이 있다고 탄식합니다.
7. 전4: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8. 얼핏 전도자의 탄식을 들으면 죽음이 삶이나 생명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불경한 말 아닌가?’ 하는 당혹감마저 듭니다.
9. 전도자의 탄식은 마치 삶 자체를 포기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의 독백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10.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전도자의 탄식은 결코 삶과 생명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를 부추기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11. 전도자는 9장 4절에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서 생명을 지키는 것이 죽음보다 더 나음을 역설합니다.
12. 전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13. 그렇다면 전도자는 왜 오늘 묵상하는 말씀에서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지 오래된 자가 더 복이 있으며 심지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자가 살아있거나 죽은 자보다 더 복되다 한 것일까요?
14. 얼핏 대단히 극단적으로 보이는 전도자의 탄식은 절망과 허무의 고백이 아닙니다. 고통받고 학대받는 이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깊은 공감과 연대를 나타낸 것입니다.
15. 전도자는 해 아래 세상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을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16. 그는 억압받고 학대받는 자들의 찢어지는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입니다.
17. 학대받는 자의 심정에서 세상을 보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18. 그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끔찍했기에,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경험하지도 않는 상태가 더 복되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19. 전도자가 죽은 자들이 복되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이 땅의 참혹한 악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20. 전도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더 복되다고 한 이유 역시, 이 끔찍한 현실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21. 다시 말해 극단적으로 보이는 전도자의 탄식은 삶과 생명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삶과 생명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저항의 표현입니다.
22. 이러한 전도자의 탄식은 성경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탄식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23.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24.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 역시 모진 핍박 속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라며 탄식했습니다.
25. 욥과 예레미야, 그리고 오늘 전도자의 탄식을 누가 불신앙의 언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26. 오히려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아픔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토해내는 것은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27. 오늘 묵상하는 전도자의 탄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모습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고발하는 통렬한 비판입니다.
28. 전도자가 본 해 아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하고 비정한 현실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마저도 저주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역설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29. 하지만 전도자의 탄식에 찬 외침은 우리를 절망의 끝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30. 위로자가 없다는 전도자의 탄식에서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31. 나만 아니면 된다는 태도를 버리고 전도자처럼, 눈물 흘리는 이들의 자리까지 내려가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32. 그들의 신음 속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절규가 들릴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함께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33.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악과 슬픔을 누구보다 깊이 보셨고, 피하지 않으시고 그 한복판으로 들어오셨습니다.
34.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을 친히 감당하심으로,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세상의 절망적인 논리를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35.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어떤 억압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36. 오늘 묵상하는 전도자의 탄식에 찬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보고 있는가? 당신의 침묵이 그들을 더 깊은 절망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은가?’
[함께 드리는 기도]
인생의 참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불의와 고통 앞에서 무감각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눈물 흘리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민감한 영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고통을 친히 겪으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절망이 가득한 이 땅에 하나님의 위로와 공의를 전하는 사랑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자유교회 이진우 목사
jayoochur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