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열심
로마서 10:1-4
올해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정확하게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마틴 루터는 독일의 신학자였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활동할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무려 1200년 이상을 유럽을 지배하였던 강력한 권세와 힘과 부를 가진 종교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 많은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갈수록 더욱 타락하고 부패하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테베르그 성문 앞에 95개 조항의 교황청 비리와 모순을 지적한 선언문을 부착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파문당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하게 됩니다. 1517년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이 500년이 지난 지금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는 개신교회는 전 세계에 무려 3000여개의 교파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대항하여 새롭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개신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카톨릭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극복하기 위해 생겨난 개신교회를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개혁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신교를 카톨릭 교회보다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고 타락한 종교집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을 앞세우는 교회이기에 교회는 세상 그 어떤 단체나 사람들보다 가장 신뢰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의 개신교 신뢰도는 최근 10년간 항상 압도적인 꼴찌였습니다. 심지어 한국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해 꼽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덕성과 정직입니다. 그 어떤 직업보다 윤리적이어야 하는 목사들의 가장 큰 문제가 윤리/도덕성이며, 그 어떤 세상 사람들보다 정직해야 하는 교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매번 이런 신문기사나 방송을 접할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기독교 신앙은 제 삶에 있어서 전부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믿고 따르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좋습니다. 저는 제가 믿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삶의 근거가 되고 기본이 되는 교회와 개신교 신앙이 이토록 심각하게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교회개혁과 갱신은 자유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목회하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삼았던 목회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해이기에 하반기에는 교회개혁과 갱신에 관한 주제로 연속하여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위험한 열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들라고 한다면 교인들마다 목사들마다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나열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엉키고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막막할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보면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드러난 문제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원인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타락과 부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에 대해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모든 문제는 목사와 교인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란 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회 건물이 망가지거나 낡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의 본질인 목사와 교인들이 교회답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목사와 교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집단이나 단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그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가정, 학교, 교회, 정당, 회사, 나라를 보십시오.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한국교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사람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누어 생각해 보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일이라면 열일을 제쳐두고 열심을 다하며 대부분의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교회에 실망한 나머지 교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교회를 비판하는 아웃사이더나, 비록 기독교 신앙은 포기하지 않지만 교회를 포기하는 가나안 교인들이 있습니다. 갈수록 그 숫자가 가장 많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개인적인 신앙에 만족하는 안주자 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깊이 참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어떤 부류의 교인들이 가장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교인들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교인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열성파 소위 아멘파라고 불리는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진 교인들은 교회에서 목사와 교인들에게 믿음이 좋다고 가장 인정받는 교인들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교인들이기도 하면 교인들이 이런 교인들이 되기를 원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이 좋고 예수님이 좋아서 목사와 함께 교회 일에 헌신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기 일보다는 교회 일을 앞세우며 헌신적으로 헌금하고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헌신과 기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가볍게 평가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헌신과 기도의 땀방울로 세운 한국교회의 모습은 과연 좋기만 할까요? 비록 열성적인 교인들의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비록 존경할만하지만 그들의 열심과 열성이 만들어낸 결과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비정상적인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신실한 신앙의 사람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라면 마땅히 아름답고 칭찬받는 교회로 반듯하게 서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입니다. 이 말씀이야 말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바울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롬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이 남들보다 특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열성이 특별했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열성으로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들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이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억압하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씀합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과 열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열성이 얼만 위험한 일을 만드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열심과 열성만 있는 신앙이 얼마나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이 이천년 전에 그토록 엄격하게 경고하였던 위험한 일들을 지금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몇 가지 교리에 기초한 아주 단순한 믿음을 무조건 믿으라고만 가르칩니다.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대다수 목사들은 교인들이 성경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면 교인들이 비판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들이 목회하기가 힘들어지며,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학이 없는 열성파 성도를 키우는 데에만 몰두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비록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고 큰 교회 건물을 짓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닌 교황의 교회가 된 것처럼 이제 개신교회 역시 예수님의 교회가 아닌 목사의 교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카톨릭 교회는 그 나마 교황이 한 명 뿐이지만 개신교회는 담임목사가 자신의 교회에서는 교황과 맘먹는 권세를 행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이 사라지고 잘못된 열심만 남은 또 다른 결과가 무엇입니까? 신앙관과 구원관이 유대주의자들을 그대로 본받고 있습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구원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런 안목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개인적인 평안과 축복, 가족의 안위를 좇는 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그게 구원의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교회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하는데 교회밖에 보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들이 그렇게밖에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목사들은 왜 그렇게 밖에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렇게 가르쳐서는 교회가 절대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역시 세상 살기도 힘든데 교회에까지 와서 골치 아픈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 합니다.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목사가 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고 교인들이 원하고 바라는 수준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한국교회의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잘 믿고 교회를 잘 섬기고 희생했던 세상에서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 없이 부족함 없이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대다수 교인들은 기복주의 신앙의 영향아래 예수님 잘 믿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염려 없이 부족함 없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화려하고 큰 교회 건물을 건축하면 마치 자신의 삶을 풍성하고 성공적인 삶으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아래 그저 열심히 신앙생활 합니다.
그럼 과연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 세상에서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부족함 없이 편안히 사는 것입니까? 아니오. 저는 절대로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그 반대입니다. 남들은 하지 않는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남들이 회피하고 외면하는 걱정을 사서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편안하고 부족함 없는 삶 대신에 오히려 불편하고 부족한 삶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에 대한 열심, 교회에 대한 열성은 분명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미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과 열성을 가지기에 앞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내 열심과 열성이 무엇을 위한 열심과 열성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열심과 열성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희생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 가운데에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맹종이며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입니다. 순종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불신앙이 아니라 더 깊은 영성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일입니다.
행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교회와 목사에 열심과 열성적인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토록 성장하였다는데 에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를 발하는 성숙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어도 여전히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어린아이 수준에서 맴도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교회 성장과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을 강조하고 가르친 목사의 일차적 잘못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예수님을 닮아가고 배워가는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의 소원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여긴 교인들의 문제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목사와 교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극복하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를 구성하는 목사와 교인들의 변화와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교회를 새롭게 하는 예수님의 가장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가 아닙니다. 회개는 지금까지 삶의 방식, 신앙의 방식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가려는 용기와 시도가 회개입니다.
막1:14-15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신앙의 열심과 열성적인 분들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그 많은 문제점에도 불국하고 저는 교회에 열심히 있고 열성적인 분들이 좋습니다. 저 역시 열정적인 삶을 살기 원합니다.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인생보다 닳아서 사라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다만 저와 여러분의 열정이 교회와 목사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