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과 신앙의 차이
고린도전서 12:24-27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3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신과 신앙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부턴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기보다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염려할 정도로 교회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에 대한 세상이 비판이나 걱정이 이제는 점점 조롱과 비난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젠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에도 모든 것을 교회 탓으로 걸고 넘어가는 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인터넷 뉴스의 댓글을 보면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세상의 걱정과 비판 그리고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수록 더욱 나빠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의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교인들은 교회에 대해 비난하기만 하지 정작 교회를 바꾸려는 시도나 노력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자로 알려진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프란치스코 수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란치스코 수사가 깊은 숲 속에서 기도하던 중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숲 속에서 이틀을 헤맸지만 도저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굶주린 프란치스코 수사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배가 고프니 제발 먹을 것을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비하게도 집 한 채가 눈에 띄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달려갔답니다. 그 집 벽에는 간판이 여러 개가 붙어 있었습니다. 간판에는 “이 집에서는 날마다 신선한 빵을 구워내고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빵집을 찾게 해주셨다고 믿은 프란치스코 수사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중년의 여인이 문을 열고 나오자 여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집에서 날마다 굽고 있는 신선한 빵 한 조각만 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답니다. “미안해요, 수사님! 우리 집에는 갓 구워낸 빵 따위는 없답니다.” 프란체스코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이 간판들은 무엇입니까?” 그 여인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우린 빵집 간판을 만드는 집입니다.”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프란치스코 수사에게 매우 큰 영적 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많아지고 있고, 여기저기에 교회를 알리는 광고와 간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를 가보면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 구원, 예수 천당이라는 간판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를 붕어빵 교회, 붕어빵 기독교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붕어빵은 붕어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붕어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붕어빵이 붕어 모양으로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붕어빵을 붕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붕어빵 교회는 모양은 교회 비슷한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교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를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오.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반복하지만 교회개혁이나 갱신은 결코 기존의 교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제도나 교리 또는 교단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란 항상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나 시스템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은 교인들이 교회다워 지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을 분류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교회와 목사를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열성적인 아멘파 교인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교회에 실망한 나머지 교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늘 교회를 비판하는 아웃사이더(outsider)나 아예 교회를 포기한 가나안 교인들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는 어떻게 됐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적인 자신의 신앙에만 관심을 가지고 만족하는 교인들입니다.
첫 번째 부류인 열성적인 아멘파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열정적인 아멘파 교인들의 열심과 헌신과 봉사는 분명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정과 열심은 항상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마음과 뜻과 멀어진다면 그 열정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내가 하는 헌신이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 내가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항상 먼저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모든 일에 항상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교인들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분명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해 비판하는 교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문제를 비판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교인들을 보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는 비판을 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주장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을 신념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영어로 will, conviction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신앙은 faith 또는 belief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념은 자기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면 신앙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하니까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서만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신앙의 이름을 앞세워 다 틀린 것이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영적폭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린다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마저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교인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비판은 스스로를 교회의 아웃사이더가 되거나 가나안 교인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아웃사이더나 가나안 교인들은 절대로 교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교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세 번째 부류의 교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신앙에만 만족하는 교인들입니다. 여러분은 세 가지 부류의 교인들 가운데 어떤 부류의 교인들이 가장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세 번째 부류의 교인들이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장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는 교인들이라 여겨집니다. 세 번째 부류의 교인들은 교회에서 가장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피해만 없다면 교회가 어떻게 하든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신앙에만 만족하는 교인들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다른 교인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사업 또는 자기가족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인들에게 교회와 신앙이란 오직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종교적 도구라고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매우 위험한 믿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소원하고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를 통해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신앙인들을 만들어 낸 데에는 목사의 잘못이 큽니다. 어떻게든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목사의 욕심이 교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을 가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잘못된 확신과 믿음을 목사가 끊임없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만 이루려고 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신앙을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본질상 이것은 우상숭배 또는 미신이라고 합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신의 뜻이나 계획을 자기의 정성이나 재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바꿀 수 없음을 알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려고 애쓰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합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 안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과 간구에 응답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 소원과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을 때에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복권 당첨시켜달라고 기도해도 당첨 시켜 주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복을 통해 우리의 이웃을 축복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남을 축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바다라 불리는 유명한 호수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이 두 호수는 똑같이 헐몬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와 같은 호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호수는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도 풍부하여 축복의 호수로 불립니다. 반면 헐몬산에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을 거쳐 사해에 이르면 이 물은 죽음의 바다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어서 이 바다의 이름을 사해라고 합니다.
왜 같은 물로 이루어진 호수인데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갈릴리 바다는 주위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받아들이지만 또한 끊임없이 요단강을 통해 그 물을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호수이지만 늘 깨끗한 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사해는 갈릴리 바다에서 흘러나온 깨끗한 물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지 못합니다.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지 않는 사해의 물은 죽은 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복을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은 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복을 우리를 통해 이웃과 세상으로 흘려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받기만 하고 모으기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우리가 이웃과 세상을 향해 흘러넘치게 하길 원하십니다. 은혜와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정말 나에게 은혜가 되고 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받은 복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그것을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나눈다고 사라지고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나눌수록 더 채워지는 복입니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지 않고 혼자 독식하면 복이 변질됩니다. 그 복에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과 불화가 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나누지 아니하고 혼자서 누리게 되면 복이 짐이 됩니다. 복이 부요함이 되지 못하고 가난함이 됩니다. 복을 나누지 않고 복을 쌓아만 두면 복이 나중에는 짐이 됩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교인들과 나누지 못하였으니까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복인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공부해서 남을 도울 수 있어야 이게 공부 잘하는 게 복인 줄 알 수 있을 텐데, 돈을 벌어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 수 있어야 내가 번 돈이 복이 될 수 있는데, 건강한 몸으로 약한 사람을 도와봐야 내가 누리는 건강이 복인 줄 깨달을 수 있을 텐데 한 번도 돕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니까 내가 누리고 가진 것으로 감사하지도 못하고 만족하지도 못하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교회는 공동체로 시작했고 공동체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신앙공동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교회 안에 있는 남이야 어찌됐든 상관하지 않는 세 번째 부류의 교인들은 교회의 본질을 가장 심각하게 훼손하는 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로 부르신 것이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완벽하게 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가 다 그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반드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경험하고 훈련하기 위해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말로 신앙공동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해 가르치기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라고 가르쳤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생명을 같이하는 신앙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고전12:25-27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처럼 초대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나 교리 제도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신앙과 삶을 도우며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는 신앙공동체라기보다는 직분과 교리와 조직으로 이루어지 건물과 제도가 교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오늘날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의 본질은 조직도 건물도 교리도 교단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것들을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신앙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교단체나 친목그룹이나 이익단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뜻을 함께 이루어 가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신앙 생활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교회가 남들에게 자신을 뽐내고 자랑하고 인정받으려는 사교단체나 친목모임과 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발버둥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려고 서로 돕고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유교회 신앙공동체를 통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육교회 신앙공동체를 통해 훈련하고 연습한 섬김과 사랑으로 우리가 속한 세상을 이전보다 더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