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신앙을 허물라
마태복음 18:12-13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실용주의 신앙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반복하지만 교회개혁과 갱신이라는 주제를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급진적인 주장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세워진 모든 개신교회는 반드시 개혁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개혁교회라는 것은 기존의 질서나 제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롬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500년 전 종교 개혁가들이 외쳤던 대표적인 슬로건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라틴어로 이것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다섯 가지 슬로건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예수님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개혁과 갱신 역시 기존의 교회나 제도를 무너뜨리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자부심이며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길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AD70년 로마 군인들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암시하신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자랑인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성전이라는 건물을 허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전 건물로 상징되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허물라는 말씀입니다.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 당시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잘못된 믿음을 들라고 한다면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외식하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대단히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지만 속사람은 조금도 거룩하거나 경건한 생각이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눈에 보이고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뜻은 결코 눈에 보이는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보이지 않는 사람의 내면이나 마음 생각 가치와 같은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삼상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이천 년 전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 신앙의 실수와 잘못을 또다시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향하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언제부턴가 교회는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건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가 교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건물을 교회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지만, 교회는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성공과 더 큰 번영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더 이상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 상처 받은 사람들, 죄인들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갈수록 교회는 힘 있는 사람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사람들, 부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택받은 자의 책임과 사명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하시길 살맛을 잃은 세상을 위해 살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사라져 어두운 세상을 위해 정의의 빛, 사랑의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선택받은 자의 책임과 사명 대신에 선택받은 자의 특혜와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세상은 어떻게 되도 상관하지 않고 예수 믿는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것에 대해 단호하고 분명하게 사람의 욕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욕심에 대해 가르치기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낫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죄의 시작에는 반드시 인간의 욕심이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마저도 잘못된 믿음에 빠지게 만듭니다.
약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교회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가르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목사들마다 교인들마다 교회의 영적 타락에 대해 수없이 많은 여러 가지 이유들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개신교회의 영적 타락이 단순히 한두 가지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신교회의 영적 타락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저는 목사와 교인들의 교회 성장에 대한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양적 성장입니다. 양적 성장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양적 성장은 단순히 교인들의 숫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재정규모가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은 성장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며, 성장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성장하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이며, 성장하는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된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실시하는 대부분의 사역이나 프로그램이 교회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예배조차도 그 초점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예배조차도 그 초점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교회로 끌어 모을 수 있을까에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강단은 점점 방송국 무대를 닮아가고 있으며, 진지하고 심각한 설교보다는 재밌고 유쾌하며 결코 길지 않은 설교를 선호하며, 신나는 찬양과 율동이 어우러진 멋지고 감동적인 예배 쇼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우리교회가 지금보다는 더 양적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양적인 성장을 우리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교회의 양적 성장이 필요하지 않거나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최소한 교회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선 교인들의 숫자가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은 가정의 경조사 정도는 자체적으로 치룰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교회는 아직 이런 기준에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양적 성장을 교회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목표는 절대로 양적 성장이 되어서도 안 되며, 양적 성장을 교회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교회는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 역시 교회의 양적 성장이 아니라 교인들의 내적인 변화입니다.
교회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 생겨난 영적 타락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탕자 교회라는 책을 쓴 제라드 윌슨 목사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적 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기는 교회들은 실용주의와 고객중심주의 이 두 가지를 교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가치와 방법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용주의와 고객중심주의는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실용주의와 고객중심주의는 반 복음적인 가치와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저 역시 제라드 윌슨 목사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양적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교회는 실용주의라는 영적 타락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실용주의는 실용적이라는 단어와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실용적이라는 것은 삶에서 꼭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실용주의(pragmatism)는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용주의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과 도로 가든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라는 속담을 들 수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 인천에 있는 대형교회에서 총동원 전도 축제를 열었습니다. 50명 이상을 데리고 오는 사람은 성지순례를 보내주고, 가장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는 사람에게는 승용차를 상으로 준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총동원 전도 축제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은 무려 103명을 데리고 집사님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집사님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비결에 대해 설명하기를 103명 가운데 70명은 하루 일당 3만원씩을 주기로 하고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양적 성장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교회로서는 50명을 데리고 온 사람에게 성지순례를 보내주고, 가장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교인에게는 승용차를 상으로 주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교인들이 새로 데리고 온 사람들이 무려 천 명이 넘었기 때문에 교회로는 원하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습니다. 또한 103명 가운데 70명을 3만원의 일당을 주고 데리고 온 집사님도 실용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교회로부터 전도 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승용차를 상으로 받았으니 결코 손해 본 장사가 아니라 크게 남는 장사를 했습니다.
이처럼 실용주의 사고방식은 결과만 좋으면 수단과 방법에 문제가 있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단이나 방법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효과가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고 효과가 없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세상에는 실용성이 필요한 분야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 실용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결코 적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가르침은 실용주의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었다고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모두가 포기하라고 하는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교회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실용주의 관점이나 생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18:12-13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으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실용주의 관점에서는 매우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 데 그 사람이 뿌린 씨의 일부는 길가에 떨어지고, 일부는 자갈밭에 떨어지고, 일부는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지고, 일부만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실용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씨를 뿌리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미리 어떤 땅에 씨를 뿌려야 할지 살펴보고 가장 좋은 땅에만 씨를 뿌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뿌리는 씨에 유전자 조작을 해서라도 더 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원하는 목적과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괜찮다고 여기는 실용주의는 매우 심각한 기독교 신앙의 변질과 왜곡 그리고 타락을 가져오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은 교인들의 꿈이나 비전을 이루는 도구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이용하고 교인들이 신앙을 이용해 비전이라고 멋있게 포장된 목사의 꿈이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나 결과에 초점을 두거나 이런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실용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목적이나 결과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과와 모든 심판과 모든 종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우리가 결국 이르게 되는 곳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우리의 수단과 방법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단과 방법으로 가능했던 것은 대부분 내가 원하고 바란 것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 건물로 불러 모으기 위해 교인들에게 승용차를 상으로 주는 방법이 효과를 거두었다면 그 방법은 대단히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그대로 베껴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더 많은 사람으로 교회 건물을 채우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교회 건물로 불러 모으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교회가 점점 실용주의 방식에 빠져든다는 것은 교회가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있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증거입니다. 효과가 좋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용주의는 철저하게 반 복음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효과, 더 많은 사람, 더 능력 있는 사람, 더 유명한 사람, 더 높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용주의는 작은 사람, 약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가르침 정면으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말 예수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면, 목사나 교인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데 효과적이지도 못하거나, 심지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가장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교회는 효과적인 수단이나 실용적인 방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정직하고 정의롭고 올바른 수단이며 방법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우리교회가 지금보다는 교인들의 숫자나 교회 재정의 규모가 지금보다는 더 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나 목적을 교인 숫자 늘이는 데 초점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교인들 숫자가 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불편해 해도 마땅히 전해야 할 설교를 할 것이며, 정직하고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마음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결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결과에 집착하는 대신에 주어진 하루하루라는 과정에 충실하며 신앙생활 하셨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인정받는 교인보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남편과 아내에게 인정받는 성도가 되었으며 합니다. 목사에게 인정받는 교인보다, 자신의 일터에서 동료들에게 좋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