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중심주의 신앙을 허물라
사도행전 2:36-42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9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고객중심의 신앙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다 알지만 정작 교인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갈수록 점점 더 교회가 기업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오늘날 교회가 기업이 되고 있으며, 교회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잘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 있는 목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가 기업이 되고 있으며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럼 교회는 언제부터 기업이 되기 시작했을까요? 교회가 기업이 되고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교회가 교회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교회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게 되었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든다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교인 숫자를 두고 교회마다 경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래의 모습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협동, 보편성과 일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 한 분이신 예수님, 한 분이신 성령님을 믿기에 모든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타락과 부패로 교회를 끊임없이 나뉘게 만들었습니다. 구교와 신교로 나뉘게 되었고 특별히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저마다 주장하는 교리의 차이로 인해 수없이 많은 교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개신교회는 아주 사소한 교리의 차이도 서로 인정하기 보다는 새로운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33,000개 이상의 개신교 교파가 있으며 매년 300여개의 교파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물론 분열이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신교회의 분열은 폭발적인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교파의 분열은 자기 교파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무허가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의 대량양산으로 교회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시대를 열었습니다.
교파의 분열과 교회의 경쟁은 교인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넓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원하는 교회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교인들에게 교회는 마켓에 진열된 상품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에게 교회를 다니는 것은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선택하기 위해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는 것은 이젠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교회쇼핑이라고 합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를 맞이한 교회는 더 이상 구도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는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복음의 원리로는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교인들을 얻기 위한 교회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교회로 하여금 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종교 상품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기업이 된 교회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종교 비즈니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기업이 되고 종교 비즈니스를 하게 되면서부터 목사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라 교회라는 기업의 CEO가 되었습니다. 교인들 역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이 되기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customer)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목사는 더 많은 고객들을 끌어 모아 교회라는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CEO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인격이나 신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있느냐 없느냐가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고 있습니다.
행11:26 사울을 만나 그와 함께 안디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로 신도가 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곳도 안디옥이었다.
CEO가 된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인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과 행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기획한 예배나 프로그램이 더 많은 교인들을 모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실용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좁고 불편한 길을 가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 수치와 비난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도 아니며 쉬운 선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나 크리스천이 아니라 고객이 된 교인들 또한 교회에 바라는 것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고객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교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바꿀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지옥의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보험증서’가 되어 주길 원합니다. 자신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전능하다는 신을 제공해 주길 원합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자주 자기를 성찰 하게 만드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주 자기 자신을 성찰 하다보면 좋은 사람이 되어 세상사는 일에 뒤쳐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고객들을 얻기 위한 교회들 간의 경쟁은 양적성장을 교회의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최고의 가치와 목적을 양적성장에 두면서부터 개신 교회는 중세 카톨릭 교회와 다르지 않는 심각한 영적 타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자입니까? 라는 책을 쓴 오르띠즈 목사는 오늘날 교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예수님 한 번 믿어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 행위로 변질시켰다고 지적합니다.
교회성장을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은 교회는 무엇을 믿는지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저 믿는다고 말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상품을 팔고 있습니다. 종교 상품으로 전락한 구원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도 하나님의 은총도 아닙니다. 종교 상품으로 전락한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한 일이 아니라 고객이라는 교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고객이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만 하면 구원쯤이야 언제든지 무조건 보장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개신교회 버전의 면죄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예배조차도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어떻게 해야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예배가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목사들은 어떻게 해야 예배를 통해 감동을 느끼고 영적인 만족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연구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룩한 시간이 아니라 더 많은 교인들을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현대 교회의 예배는 잘 기획되고 연출된 TV 쇼처럼 점점 더 화려하고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예배의 변질은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한 교회의 위기입니다. 예배는 교인이라는 고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예배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며 예배를 돕는 장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교회의 장식이나 형식을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특별한 느낌이나 심리적 만족을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유일한 목적은 예배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예배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예배 시간에 정장이나 목사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목사가 왜 다른 교회 목사들처럼 정장이나 가운을 입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이 없습니다. 그저 목사가 정장이나 목사 가운을 입는 것이 불편해서 안 입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목사가 정장이나 목사 가운을 입고 설교를 하면 똑같은 설교도 훨씬 더 권위 있게 듣는다는 것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예전에는 예배 때마다 정장을 입고 주일예배에는 항상 목사 가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목사의 잘 차려입은 정장이나 가운이 목사를 더욱 돋보이게는 할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목사의 정장이나 가운이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그럴듯한 정장이나 가운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의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정장이나 목사가운을 입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장이나 목사가운이 가져다주는 세상 방식의 권위나 품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가진 권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권위가 품격이 그 사람의 말을 더욱 값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가진 권위는 목사의 복장이 아니라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 그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복장이 아니라 목사가 하는 메시지 자체에 더욱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장이나 목사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양적성장을 교회의 최우선 가치와 목적으로 하면서부터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 교인들이 원하는 일에 더 큰 관심과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신의 사무실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힌 포스터를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객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고객이 가치를 두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얼핏 교회와 목사가 교인들의 필요와 관심에 초점을 두고 교인들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빌 하이벨스 목사는 고객 중심주의 방식의 목회방법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고객 중심주의 방식의 그의 목회방법은 많은 목사들이 따라하는 목회 방법이 되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가? 고객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라. 당신이 고객을 섬기기 원하는가? 그들을 평생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의 원하는 것을 제공하라. 고객은 언제나 옳다. 이것이 대부분의 성공한 사업가들이 더 많은 고객을 얻기 위해 지켰던 절대법칙이라고 합니다. 물론 교회나 목사 역시 마땅히 교인들을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 교인들의 항 상 옳다고 여기며 그들의 욕구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객이라고 여기는 장차 교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나 지금 교인인 사람들은 결코 옳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항상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옳은 선택과 결정보다는 옳지 않은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불완전한 고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교인들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도 하고,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은 원하기도 합니다. 또한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최선이 아닌 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인이란 잘못된 길을 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교인들을 섬긴다는 것은 교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맞추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무리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도 아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아이들에게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교회가 교인들을 섬긴다는 것은 그들의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추어 주거나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 주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날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는 말씀에 초점을 둡니다. 하지만 여기서 삼천 명은 이미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듣고는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는 데 있습니다. 양심에 심각한 아픔을 느낀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행2:37-38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을 받아들이고는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더욱 열중했으며 서로 사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행2:41-42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말씀을 마칩니다. 고객이 중심이 된 교회는 예수를 잘 믿으면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고, 가문이 번성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자녀가 잘 되고 복을 받는다고 말해 버립니다. 마치 선거 때 정치인들이 그럴듯한 공약을 남발하듯이, 목사들은 예수 믿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장밋빛 공약을 남발합니다. 심지어0 예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예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으며, 심지어 세상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이 옳은 길이기에, 진리의 길이기에,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기에 그 길을 가도록 돕는 것 이것이 예배이며, 이것이 회개이며,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며,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