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교회개혁과 갱신10-목사의존 신앙을 허물라
[ 첨부파일 일괄 다운로드 ] [ 첨부파일 3개 ]
교회개혁10.mp3

(설교녹음은 중간중간 끊긴부분이 있습니다. 설교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의존 신앙을 허물라

마가복음 12:38-40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10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목사의존 신앙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목사인 제가 이런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배우고 깨달은 대로 정직하게 설교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반드시 꼭 전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깨달음이 있어 용기를 내어 설교를 합니다.


아시다시피 올해는 1517년에 시작되었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수많은 종교 개혁자들은 목숨을 내걸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고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나누어지면서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는 신학이나 교리에서 많은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차이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교회만의 가장 중요한 차이를 들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코 만인 사제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인 사제설은 만인 제사장설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제이며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만인 사제설 또는 만인 제사장설의 근거로 내세운 성경말씀은 베드로전서 25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종교 개혁 이전까지는 신부와 같은 사제가 하는 교회 일만을 성직이라고 했으며 사제들만을 성직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 이후 교회는 사제가 하는 교회 일만이 성직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직업을 성직이라고 여겼으며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성직을 하는 성직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명품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유럽의 명품들은 자신의 하는 일을 성직이라고 여겼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에 의해 시작되고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은 목회는 무조건 성직이고 목사는 성직자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목회가 성직이고 목사가 성직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맡은 일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느냐에 따라 목회가 성직이 될 수도 있고 강도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목회나 목사만 해당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느냐에 따라 성직과 성직자가 될 수도 있고 도둑질과 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직업이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만인 제사장 신학과 신앙은 교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제에게는 교인들에 대한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가르쳤고 교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제가 축복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제가 저주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사제가 가진 축복권이나 저주권 같은 절대적인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믿기에 만약 사제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면 교인들에게도 사람에 대한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목사에게는 사람에 대한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가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는 사람은 이전보다 더 잘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저주권도 있어 사람을 저주하고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사인 저에게만 있는 권세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도 있는 영적 권세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에게만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영적 권세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는 모든 교인들에게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목사의 축복기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권세를 바르게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왕이면 사람을 축복하며 살기 바랍니다. 내가 빈 축복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지 않으며 그 축복이 나에게 온다고 하셨기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사람을 미워하거나 저주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저주한 것이 그 사람에게 억울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자신에게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12-1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또한 카톨릭 교회는 교인들도 하나님께 직접 기도는 할 수 있었지만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굳이 사제나 목사의 기도가 아니라도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며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만인 제사장 신학과 신앙 이전에는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당시 일반인들은 사용하지 않던 라틴어(로마어)로만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교인들은 성경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라틴어를 아는 교인들이라고 해도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몰래 성경을 읽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신학을 배우지 않는 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성경의 거룩함을 훼손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미사에서 사제가 읽어주는 성경낭독도 라틴어로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교인들은 사제가 아무리 성경을 읽어준다고 해도 그 뜻도 모른 채 무조건 그냥 듣기만 해야 했습니다. 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으니 사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사제가 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교인들에게 사제의 종교적 권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결과 교황무오설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만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타락했다는 유대교 신앙보다도 더 타락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에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을 교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였으며 금속활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성경을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고, 교인들도 원하기만 하면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사제들만 성경을 읽을 수 있거나 해석할 수 있다는 절대적 종교적 권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성경 말씀을 누가 더 바르게 잘 설명하고 해석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 외에도 만인 제사장 신학과 신앙이 가져온 교회의 변화는 엄청납니다. 이전까지 교회는 교인들이 사제를 섬기는 교회였지만 이제는 목사가 교인들을 섬기고 돌보는 교회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전까지는 사제에게만 허락되었던 교회에 대한 모든 종교적 권한을 교인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합니다. 신학을 공부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라는 직분이 생겨났으며, 목사와 함께 교회를 섬기는 교인들에게도 장로와 권사 집사와 같은 직분을 부여하여 목사와 협력하여 함께 교회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교인들을 성직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인 제사장 신앙은 타락하고 부패한 중세 교회를 성경의 가르치는 교회로 바꾸기 위한 종교 개혁가들의 매우 중요한 신학이며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 종교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던 만인 제사장 신앙은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많아질수록 교회는 예전 중세 카톨릭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종교적 권한과 권위는 카톨릭 교회의 사제와 별반 다르지 않는 권한과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에게 우선적으로 성경에 대한 해석과 설교에 대한 권한을 주는 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사의 성경해석이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겨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카톨릭 교회의 교황 무오설과 다를 바 없는 목사 무오설입니다. 아무리 수만 명의 교인들을 목회하는 유명한 스타 목사라고 해도 욕구와 욕심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유명 목사의 설교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목사의 설교에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사의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목사의 해석이라고 들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듣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신앙의 왜곡을 가져오게 만듭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성경을 모든 교인들이 읽을 수 있고 묵상할 수 있게 한 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이나 적용을 비판할 수 있고 견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교인들이 신학을 공부한 목사의 성경 해석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정직한 마음과 믿음만 있다면 최소한 목사의 설교가 교인들을 미혹하려는 그럴듯한 거짓 설교인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진짜 설교인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믿음입니다. 목사를 의지하고 목사를 의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부 목사들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제사장이라며 목사를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이 아니라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목사가 제사장이면 교인들도 제사장입니다. 목사가 성직자면 교인도 성직자입니다. 목회가 성직이면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세상의 모든 일도 성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다른 말로 하면 결코 사람을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목사도 포함됩니다. 아무리 목사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인다고 해도 목사의 설교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을 목사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대형 교회 교인들 가운데에는 목사를 하나님 다음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우리교회에는 이런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이것이 얼핏 꽤 신실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목사와 교회를 타락케 만들고 망가뜨리는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지나치게 목사를 의존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해야 할 기도조차도 목사가 대신 해 주길 바랍니다. 목사가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어야만 자신에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고 축복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단순히 잘못된 신앙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신성모독입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지 않지만 목사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일까요?


그렇다고 목사나 또는 다른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낫고, 두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열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훨씬 더 낫다고 믿습니다. 이왕이면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는 목사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기도한다고 무조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응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려는 의로운 사람이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5:29]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5: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1238-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 대해 그야말로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외식하는 신앙을 일일이 나열하시며 비판하시고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타락한 율법학자들을 책망하기 위한 말씀입니까? 아니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백성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2: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잘못에 대해 일일이 나열하시며 비판하신 이유는 유대 백성들이 왜 율법학자들을 조심해야 하는 가에 대한 설명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무조건 믿지 말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는 것입니까?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서 그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신앙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지만 너무나 많은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어디서나 대접받으며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고,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하며 심지어 돈에 대한 욕심도 많아 가난한 과부의 재산까지도 탐을 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신앙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얼핏 이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문제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정직한 자세와 태도를 가지기만 하면 아무리 교묘한 잘못된 종교 가르침이라도 누구라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이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남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 남들보다 더 성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외식하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신앙을 가르쳤던 목사나 종교지도자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신앙을 받아들였던 교인 역시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한 목사들이 자꾸만 많아지는 것은 단순히 목사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런 목사들에게 필요이상으로 의존하는 교인들이 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목사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목사의존 신앙은 우상숭배의 변형일 뿐, 결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멀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와 목회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목사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유명한 목사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의존할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목사도 지극히 평범한 욕구와 욕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고민하고 때로는 실망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다만 각자 자신의 은사에 따라 또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신앙의 동역자로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새글 0 / 341 

검색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공지 자유교회 주일예배 영상 Youtube 링크 2021.04.21 4804
341 십계명20-사람의 생명이 존엄한 이유 2025.07.20 138
340 십계명19-약속 있는 첫 계명 2025.07.19 135
339 십계명18-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 2025.07.19 130
338 십계명17-왜 부모 공경이 살인 금지보다 먼.. 2025.07.19 134
337 십계명16-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 2025.07.19 132
336 십계명15-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 2025.07.19 134
335 십계명14-안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2025.06.07 217
334 십계명13-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 2025.05.24 309
333 십계명12-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2025.05.24 320
332 십계명11-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의미 2025.05.24 318
331 십계명10-우리가 만들어내는 하나님 2025.05.24 369
330 십계명9-우리의 신앙, 믿음입니까? 미신입.. 2025.04.06 335
329 십계명8-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2025.04.06 323
328 십계명7-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제한하지 .. 2025.03.18 422
327 십계명6-코람데오(Coram Deo) 2025.03.18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