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주의 신앙을 허물라
고린도전서 3:6-7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1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결과주의 신앙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결과주의가 무엇입니까?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란 드러난 결과를 기준으로 해서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결과주의 방식에 따르면 아무리 좋은 의도와 마음을 가지고 어떤 일을 했다고 해도 그 결과가 나쁘면 실패한 일이 됩니다. 반대로 나쁜 의도나 마음을 가지고 어떤 일을 했지만 그 결과가 좋으며 성공한 일 좋은 일로 여깁니다.
드러난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결과주의는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이며 세상적인 방식이지 결코 기독교 신앙의 방식은 아닙니다. 결과주의와 비슷한 가치와 방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과주의, 성공주의, 번영주의, 인정주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과주의와 대단히 비슷한 세속적인 가치이며 세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은 절대로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가치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그 어디에도 이런 교훈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결과주의라는 지극히 세속적이며 세상적인 가치와 방식을 교회와 교인들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더 나은 결과, 더 나은 성공, 더 나은 번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남들보다 더 큰 성공이나 출세 또는 물질의 풍요를 하나님의 은혜로 착각합니다. 남들보다 더 누리는 것을 자신의 신실한 믿음에 대한 증거로 여깁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으며 신앙생활 했기에 남들보다 더 큰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남들보다 더 큰 물질을 축복으로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예전에 제가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목사가 부흥회 강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의 부흥회 설교가 너무나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어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설교가 있습니다. 그 목사는 스스로 자신을 성공한 목사라며 자신의 목회가 성공한 비결에는 자신의 기도가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도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자신이 가르쳐 준대로 기도하기만 하면 모두가 자기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분명 그 목사는 소위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크게 성공한 목사였습니다. 수천 명의 교인들을 목회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에다가, 교계에서도 이름께나 알려진 유명한 목사여서 거의 일 년 내내 부흥회 강사로 다니는 목사였습니다. 스스로 이런 것을 설명하며 자신의 성공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목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서인지 부흥회에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귀를 쫑긋하고는 열심히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가 가르쳐 준 기도의 비법입니다. 자신은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제가 성공하게 해 주세요. 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만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 목회가 꼭 성공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손해 보지 않으시려고 창피 당하지 않으시려고 자신을 성공한 목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기도할 때마다 자기와 똑같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만 손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병들고 실패하면 하나님께서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하게 해 주세요. 저는 그 설교를 듣는 내내 너무 불편했습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도무지 믿음이라 할 수 없는 것이며 제 정신 가진 목사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설교에 소위 교회에서 말하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한 교인들이 대부분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흥강사의 설교도 아닌 궤변에 큰 소리로 아멘 아멘을 하며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순간 제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 목사와 교인들이 이상한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흥강사의 기도 비법이 과연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과 맞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약한 것을, 고난 받는 것을, 고통당하는 것을, 핍박받는 것을, 멸시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 가지 약한 것들을 자랑하라고 가르쳤지 내가 제일 잘 나가고, 내가 제일 성공하고, 내가 제일 부유한 것을 자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약하고 병들고 핍박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하셨지 내가 잘 나가고, 성공하고 부유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고후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나를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는 기도와 설교가 난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험이나 승진, 사업이나 건강 등 우리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우리의 성공, 우리의 건강, 우리의 출세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실패, 우리의 질병, 우리의 가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람의 성공과 출세와 부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성경에도 없는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신앙이 주도하는 교회에서는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앙생활 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실패나 질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교인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할 때에 위로와 격려는커녕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듭니다. 그 결과 가장 하나님과 교인들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할 때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과주의 신앙이 교회에 끼친 악한 영향력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 제가 사업에 꼭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세상에서 더 크게 출세해서, 성공해서, 유명해 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 뭐 이렇게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과연 하나님께서 너 꼭 성공하고 유명해져서 내게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아니면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내 영광이니 아니면 네 영광이니?” 하고 묻지 않으실까요?
개인의 성공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실패하거나, 직장을 잃거나, 이혼을 하거나, 암에 걸린 사람은 도대체 교회에 어떻게 자신의 실패나 고통을 설명해야 하나 고민부터 하게 됩니다. 위로와 기도가 정말 필요한 때에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며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늘 성공한 사람들만이 넘쳐 납니다.
왜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그리고 목사와 교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낸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낸 예수님을 믿는 것을 믿음이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것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출32:4-5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의 절기를 지키자."하고 선포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라면 두 번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하시고,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절대로 예수님에 대한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우리를 잘못된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위험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분명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비록 저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했지만 저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소원을 이루어 주는 자신이 만든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만 가지고는 매우 위험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선 반드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리 헌신적이고 대단하게 보인다 해도 결국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게 만들 것입니다.
어떤 식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게 좋다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바알신앙과 맘몬신앙입니다. 우상을 믿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을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해도 그 과정이 옳지 않으며, 그 의도가 바르지 않으면, 그 동기가 선하지 않으면 악한 일이라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최선을 다했어도 실패로 끝나는 일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동기가 옳았고 그 일을 진행하는 과정도 정직했지만 결과는 분명 실패로 끝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은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 그 결과가 나쁘면 그 동기와 과정도 부정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의도와 과정입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 의도와 과정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지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 출세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공한 그리스도인, 유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좋은 목자, 선한 목자는 성경에 있어도 성공한 목자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 선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성공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행복을 성공이나 물질 같은 곳에 두지 않으시고 사람의 좋은 마음, 선한 마음에 두셨습니다. 물론 성공한 사람이나 부자들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세상이 주는 것이라 오래 가지 않습니다. 성공하면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부자가 되면 당장은 행복한 것 같지만 이런 행복과 만족이 금세 사라집니다. 그래서 더 큰 성공과 부를 욕심내게 만듭니다.
이것은 결코 성공을 위해 사는 것이, 물질의 부요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성공주의가 문제입니다. 반드시 물질의 부요함을 얻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물질주의가 문제입니다. 비록 성공이나 물질의 풍요를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결과로부터 자유롭기만 해도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가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만 할 수 있어도 우리는 지금 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공할 때, 형통할 때, 승승장구할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 더욱 가까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과로만 그리고 결과가 성공의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하나님에 대한 왜곡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은 결코 인생의 성취나 업적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이루어 낸 성공이나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하루하루 어떤 마음과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갔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고 관심을 가지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과 결정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방식이며 신앙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비록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결코 씨를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다만 씨를 뿌릴 뿐입니다. 물을 줄뿐입니다.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대신하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이지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물론 삶을 살아가며 자기 인생의 꿈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꿈이나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걸어왔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시는 것은 그 꿈과 사명을 반드시 이루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힘쓰며, 때론 실패로 낙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상을 믿는 것은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풍성한 제물을 바치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상을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이루고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좁은 문, 좁은 길을 기꺼이 가려는 발걸음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쉬운 예수는 없습니다. 쉬운 믿음은 없습니다.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무조건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숨에 되지 않습니다. 일평생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바치는 제물에 있지 않고 제물을 바치는 우리의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진짜 제물은 우리가 살아 온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