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중심의 신앙을 허물라
누가복음 10:38-42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14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사역중심의 신앙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사역이라고 하면 이른바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프로그램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행하는 각종 집회나 성경공부, 단기선교, 봉사활동 등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사역이라고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제가 주장하는 것은 사역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신앙을 허물라는 것이지 교회의 모든 사역을 허물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역중심의 신앙은 우리 교회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사역이 너무 없어 사역 중심 신앙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우리교회는 집회나 프로그램이 다른 교회들에 비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참여하실 분들만 계신다면 주중에 성경공부 프로그램 하나 정도는 있으면 더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설교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스쳐 지나갔던 여러 교인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가장 들었던 이야기가 우리교회에는 신앙 프로그램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좀 규모가 있던 교회를 다니다 우리교회에 오신 분들은 처음에는 많이 당황하십니다. 주일예배 말고는 주중에 모이는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으니 불안해하십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해도 괜찮은지 걱정이 되시나 봅니다. 혹시 이런 분이 있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예배와 아침묵상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많은 예배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제자훈련과 같은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여러 가지 교회 봉사나 단기 선교와 같은 것을 많이 해야만 신앙이 자라고 성숙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한 때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교인들을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이런 생각과 믿음이 깨졌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나치게 많은 예배나 교회 사역이 바른 신앙을 가지거나 신앙의 성숙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이 그저 교회에서 행하는 수많은 집회와 프로그램에 열심히만 참석하는 교인들 대부분은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열심과 헌신이 자기 과시와 자기 의가 됩니다. 예전에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임원회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과 반대되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자 담임목사 편이라고 하는 다른 장로님이 대뜸 새벽 기도회도 잘 안 나오는 장로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 교회에서만 일어났던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지키는 종교적 행위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여기는 일은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죽하며 교회마다 이런 일이 너무나 많으니까 이런 것을 두고 경건의 폭력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인터넷 기독교 신문에 실린 칼럼의 일부분입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를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장로 권사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단기선교를 다녀온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단기선교도 갔다 오지 못한 교인이 교인이냐는 핀잔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도원에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대형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경건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책망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율법과 기도와 구제와 금식과 같은 종교적 행위를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지키는 종교적 경건으로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고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외식하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마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아야기입니다. 프란체스코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스프 냄새에 사로잡혀 스프를 먹고 말았습니다.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은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었습니다. 분노로 가득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젊은 제자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성경공부와 교회 봉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스런 교인을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까? 한국교회의 수많은 예배와 프로그램과 봉사활동은 사람들을 충성스런 자기 교인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는 분명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데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보다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다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집회나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하는 분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성숙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는 교인들보다는 자신처럼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일에 열심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일이 되고 맙니다.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어른 목사님들로부터 가장 많은 들은 목회 비법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가 되기 위해 무려 6년 이상을 신학교를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막 시작하는 새끼 목사에게 소위 성공했다는 어른 목사들이 충고하는 것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하면 절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장 많은 들은 목회 비법입니다. 목사는 각종 집회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그야말로 교인들을 일주일 내내 달달 복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교인들이 딴 생각 안하고 딴 마음 안 품고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드러내 놓고 말만 안 했지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잘 지키는 목회 방식입니다. 그 결과 교회들마다 경쟁적으로 온갖 종류의 집회와 프로그램들을 실시하며 교인들을 그야말로 달달 복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선배 목사들이 후배 목사들에게 전해 준 두 가지 목회 비법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교회를 이토록 심각한 타락에 빠지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선배 목사의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 했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을 달달 복아 교회와 목사에게만 의존하는 교인 만들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고 질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었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토록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목사에게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교회와 목사들에게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믿음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가장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 우리가 이전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우리가 이전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일이나 대단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봉사 단체나 선교 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곳이 아니라 어떤 사람 되느냐가 가장 중요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데도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더니만 일어 설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만 듣고 있지 도무지 자신의 일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다못한 마르다가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아무 일도 안하고 앉아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서는 자신의 일을 도우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는 이렇게 수고하고 있는데 동생이 얌체같이 내 옆에 앉아서는 내 설교만 듣는다며 마리아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를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분주하게 일하는 마르다를 꾸짖는 말씀을 하십니다.
눅10:41-42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은 마르다의 지나친 열심과 많은 일이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대접하는 좋은 일이라도 너무 분주하여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피곤에 지쳐 불평과 불만이 생긴다면 이것은 곧 신앙의 위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이 하여 분주한 것은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너무 분주해지면 그 일의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적을 잃어버리며 결국 일을 위한 일이 됩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좋은 일을 하면서도 불평과 원망이 일어납니다.
이민생활 모두가 바쁘다고 합니다. 아무리 바쁜 생활일지라도 모든 일에는 항상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하고 당장 바쁜 일에 매달리게 되면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에 분주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봉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말씀 듣는 것만 잘하는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정작 시험을 보면 점수가 안 나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런 친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부분 이런 친구들은 영어 수업 시간에 수학 책 펴들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수학 시간에는 영어 책 들고 단어 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죠! 반면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같지 않은 데도 시험만 보면 점수가 잘 나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그 수업에 최선을 다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왜 예수님을 대접하는 좋은 일을 하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였을까요? 어떤 사람이 되느냐(to be)보다 무엇을 할 것이냐(to do)에 자기 인생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항상 무슨 일을 하느냐에 초점을 둔 신앙은 늘 분주하고 바빠서 쉽게 지쳐 불평불만을 하거나 자기 자랑이나 우월감에 빠져 외식하는 신앙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신앙을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초점을 둔 신앙은 늘 여유로우면서 겸손한 신앙인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한 곳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일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일로 바쁘다고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데 정작 신앙이 주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로지 사역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분주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일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면 이건 정말 큰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지팡이 하나로도, 돌멩이 하나로도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떠한 교만이나 자랑도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이고 일만하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 자꾸만 많은 일로 교인들을 분주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은 내가 이룬 업적이나 일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일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은혜 받고 받은 은혜를 나누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은혜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은혜로 감사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거나, 과시하거나, 경쟁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서 하는 일은 일이라 하지 않고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섬김은 자신의 능력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섬김은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과 경쟁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섬김은 보상이나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 아니라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능력은 세상에서 보이면 됩니다. 교회에서는 무능력한 사람처럼 오직 은혜 받는 일만 사모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닐수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고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