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주의 신앙을 허물라
누가복음 7:33-35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15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배타주의 신앙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배타주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배타주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선 먼저 배타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배타주의는 “자기만을 고집하고 남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타주의 신앙은 남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배타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믿는 종교나 신앙 이외의 다른 종교나 신앙은 모두 척결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배타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몇 번이나 준비하려고 했다가 중간에 포기했던 설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배타주의 신앙이 교회를 개혁하고 우리의 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선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잘못된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번 배타주의 신앙에 대해 설교를 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번번이 제 실력과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배타주의 신앙이 과연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은 신앙인지를 분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에 대해 말하기를 기독교는 배타주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종교학자들의 평가처럼 기독교 신앙에는 분명 배타주의 경향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에서 나타나고 있는 배타주의 신앙은 너무나 뿌리가 깊고, 너무나 오래되고, 너무나 복잡하여 지금도 매우 심각하게 논쟁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설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개혁과 갱신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 주제를 그냥 건너뛴다는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이 주제를 제 능력의 부족 때문에 깊이 있게, 심도 있게 이 주제를 다루지는 못한다할지라도 반드시 이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비록 수박 겉핥기가 되더라도 배타주의 신앙에 대한 문제제기라도 해야 한다는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이런 책임감이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제 생각과 믿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신앙의 진리를 더욱 깊이 알면 알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지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더욱 너그럽고 포용적이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교인들의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자기가 다니는 교회만 최고라고 여깁니다. 자신이 속한 교단만 옳고 다른 교단은 문제가 많은 교단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배타주의 경향은 타종교에 대해선 더욱 극단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는 모두 우상숭배라고 여기며 물리치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타종교에 대해서 상대방의 종교와 신앙을 존중하기는커녕 반드시 물리치고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현상을 종교학에서는 타자의 악마화라고도 합니다. 타자의 악마화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와 다른 신앙이나 믿음은 모두 물리쳐야할 악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신앙은 모두 우상숭배이며 반드시 물리치고 없애버려야 할 악마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단순히 타종교에만 적용되지 않고 같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자신과 다른 믿음과 신앙에 대해서는 적대시하며 없애버려야 하는 악마로 여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기독교는 조금만 다른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악마라는 딱지를 붙이고 가차 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또한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이렇게 하는 것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밝혀진 사실은 중세교회가 마녀사냥을 했던 진짜 이유는 악마나 마녀들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이 자신들의 종교적 부패와 타락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 가운데 배타주의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종교가 세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교적 분쟁의 배후에는 이 세 종교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 종교는 서로 자신들이 믿는 신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세 종교의 신앙의 근본이 되는 신은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세 종교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리와 신학이 다르다고 자신들이 믿는 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주장일까요?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옳다며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전쟁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단지 나와 다른 교회에 다닌다고, 나와 다른 교단에 소속됐다고, 나와 다른 믿음의 방식을 가졌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과연 예수님께서는 단지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가운데 기독교외에 다른 모든 종교와 신앙은 무조건 우상숭배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분명히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으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 눈에 보이는 임의의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 산에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갔을 때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는 이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선 이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제멋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자신들이 만든 형상을 신으로 섬기는 모든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우상을 부수라고 하셨을 때도 같은 의미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 신상(남자신)과 아세라 신상(여자신)을 자기들 상상대로 만들고는 이 신들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사람이 상상하여 만든 신상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신상을 소유하거나 그 신상에 절하고 제사지내므로 사람이 만든 신상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이 있었음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온갖 종류의 신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들들 벌여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신상을 부수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삿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렘10:14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만들어 신상에 절하고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복을 준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을 함께 모시고 숭배하였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보이지 않는 신의 형상을 만들고는 그 신을 잘 섬기면 자신들에게 복이 된다고 가르치는 모든 신앙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타종교는 우상숭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불교를 예를 들면 우리는 불교를 우상숭배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우상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 참선과 고행과 수행을 통해 육신의 욕심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많은 불교사원에서는 부처상을 만들고 절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불교라는 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물론 구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와는 다르게 유대교나 이슬람은 신을 믿는 종교이지만 이들 종교를 믿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모두 같은 하나님을 신으로 믿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이슬람은 알라라고 그리고 기독교는 영어로는 GOD이고 한글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일부 목사나 신학자들 중에는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성경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이슬람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유대교의 하나님도 다른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장 구약을 우리가 믿는 성경에서 제외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슬람 역시 유대교의 율법이라고 하는 모세 오경과 시편을 자신들의 경전이라고 하는 꾸란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은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나 이슬람과는 전혀 다른 신앙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대교나 이슬람을 적대시하거나 악마로 여겨야 하는 신앙적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유대교나 이슬람을 적대시하여 없애 버려야 할 악마로 여기셨을까요? 저는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해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기독교를 유일신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단일신 신앙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다른 신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결코 다른 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혼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23:13-14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우상숭배나 다른 신에 대한 성경의 금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바알 신앙이나 아세라 신앙, 맘몬신앙 등을 적당히 혼합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 샤머니즘이나 다른 신앙을 혼합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금지하신 것은 다른 종교를 척결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신도 함께 섬기는 이른바 종교 혼합주의를 엄격하게 금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타 문화권에서 오랜 세월을 걸쳐 지속되어온 다른 종교를 우상숭배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인종차별과 같은 종교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 잘못된 편견입니다. 타종교를 다른 종교로 인정한다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인 우리가 타종교를 믿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아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타종교를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함부로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표적인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스스로를 경건하고 거룩한 자로 여겼던 것은 지극히 편협하고 주관적인 자기들의 기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도 않는다며 귀신이 들렸다고 조롱하고 경멸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에 대해서도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며 예수님을 경멸하고 적대시했습니다.
눅7:33-34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야말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유대교의 대표적인 배타주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정죄하였던 것이 정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죄인이라고 정죄하였던 의인과 죄인의 프레임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질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심으로 저들의 악한 종교질서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깨뜨리려고 하셨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선을 긋고, 세상을 외면하고 세상을 정죄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과시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려고 합니다.
물론 죄와 구별되는 것은 좋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매우 신실한 모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든든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지 이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 지킨다고 해서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라는 식의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비난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신체적 장애가 없이 태어난 사람들이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비 정상인이라고 규정하므로 자신들을 정상인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매우 비겁한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정상이다 비정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교만과 어리석음을 넘어서는 악한 일입니다.
나와 다른 믿음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미워하고 적대시 하는 배타주의 신앙은 결코 예수님의 방식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도 아닙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다른 교회를 다닌다고, 나와 다른 교단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더 나아가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미워하고 적대시 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배타주의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할 기준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신앙이 라고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자유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나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더 나아가 다른 종교에 대해 좀 더 여유롭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