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교회개혁과 갱신16- 원칙과 본질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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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16 .mp3

원칙과 본질로 돌아가라

마태복음 7:13-14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16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원칙과 본질로 돌아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웅장하고 화려해서 성전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성전은 오로지 겉모양만 웅장하고 아름다웠지 그 속은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성전이라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이라는 건물 중심으로 행해지는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타락한 종교 행위를 무너뜨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흘 동안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더 이상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신앙 운동을 일으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열 번에 걸쳐서 허물어져야 하는 성전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로또 신앙, 특혜 신앙, 실용주의 신앙, 고객중심주의 신앙, 목사의존 신앙, 교회중심 신앙, 결과주의 신앙, 잘못된 헌금 신앙, 사역중심 신앙, 그리고 지난주에 설교했던 배타주의 신앙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편 가르기 신앙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열 가지 신앙은 아주 그럴듯하여 교회와 교인들에게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인양 오해되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만들어낸 허물어야 할 내가복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제까지는 허물어야 할 잘못된 성전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번 주부터는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바른 신앙과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위기일수록 그리고 그 위기가 심각하면 할수록 순발력이나 임기응변이 아니라 원칙이나 본질로 돌아가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그라지 도어) 수십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교회는 임기응변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감추려고만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가 더욱 심각해 졌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였을 때 마틴 루터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운 다섯 가지 슬로건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학이나 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위기일수록 성경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침을 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기록된 특별히 2장과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교회들로 지금의 터키에 세워졌던 일곱 교회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를 소아시아 일곱 교회라고 합니다.


1: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1:11 이르시기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로 보내어라" 하셨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이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다음 주부터 나눌 일곱 교회에 대한 개요로서 어떻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이해하고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막연하게 요한계시록을 세상의 종말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세상의 종말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로마황제의 명령에 의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던 사도 요한을 기름 가마에 넣어 죽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독약을 마시게 했습니다. 하지만 독약을 마시고도 사도 요한이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사도 요한을 죽이려던 로마황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밧모 섬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 결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도들 가운데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 제자였다고 합니다. 밧모 섬에 끌려간 사도 요한은 거기서 예수님으로부터 일곱 교회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이 받은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지금의 요한계시록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칭찬이며 책망이며 교훈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로마제국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에 많은 교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더 이상 로마제국이나 네로와 같은 로마황제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곧 로마제국과 로마황제에게 임할 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요한 계시록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교회와 교인들에 하나님의 복을 약속하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과 로마황제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을 그대로 써서 편지를 보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로마의 검열로 인해 편지가 전달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편지를 받는 교회가 더 큰 박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말씀을 로마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 편지를 보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당시 로마인들 읽게 되면 일종의 암호문과 같아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요한계시록은 아무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없도록 갖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적인 표현들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약속하시며 위로하시는 말씀을 가지고 오히려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짐승의 표나 짐승의 숫자라고 하는 666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강조하므로 교인들로 하여금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어서는 잘못된 종말론 신앙에 빠지게 만듭니다.


13:16-18 (현대인) 그 짐승은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자유인이건 종이건, 모조리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를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했는데 이 표는 짐승의 이름 또는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지혜가 필요합니다. 총명한 사람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이며 666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짐승의 표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짐승의 이름 또는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누구를 뜻하는 것입니까? 교회와 교인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로마황제였습니다. 특별히 당시 가장 악독하게 교회와 교인들을 핍박하였던 네로 황제를 짐승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많은 교인들이 대단하고 엄청난 일처럼 여기는데 이것은 그렇게 대단하고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책가방에다 또는 필통이나 도시락 가방 같은데다가 자기 이름을 썼습니다. 그럼 소지품에다 이름을 쓰거나 이름표를 붙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 거라는 것입니다. 내 소유물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노예를 사고 팔 때 구입한 노예의 이마나 오른손에 주인이름의 이니셜을 새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마나 오른손은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노예들로 하여금 쉽게 도망을 치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노예가 자신의 노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사람들에게 짐승의 이름 즉 황제의 이름을 이마나 오른손에 새긴다는 것은 이 사람들은 짐승에게 속한 사람 즉 로마 황제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로마의 시민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황제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짐승의 이름 즉 황제의 이름을 자신의 신체에 새기는 것을 사도 요한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고 표현 했으며 이것은 곧 짐승에게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승에게 속했다는 것을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황제숭배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저는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요한계시록이 어렵고 복잡한 상징과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리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면서 묻습니다. 강력한 권세와 힘을 가진 로마황제를 숭배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면 살 것인가? 이것에 대해 묻고 있는 성경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강력한 권세와 힘을 가진 로마황제를 숭배하기만 하면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경제적인 이익과 사회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우상도 숭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로마황제에 대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면 도무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온갖 고초와 고문을 당하고 로마인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야수의 먹이가 되거나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황제를 숭배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도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보낸 요한계시록 편지를 읽었던 일곱 교회 성도들이 직면한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강력한 권세와 힘을 가진 로마황제를 숭배할 것이냐 아니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할 것인가? 요한계시록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던졌던 이 문제는 단순히 로마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와 핍박에 시달리던 초대교회에게만 묻는 질문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권세를 숭배할 것이냐 아니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할 것이냐를 묻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21세기 지금의 교회에게도 여전히 묻고 있는 성경의 질문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박해나 핍박이라고 하면 물리적인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것만을 박해나 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물리적인 폭력이나 생명에 위협과 같은 환난이나 역경은 겪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 어떤 물리적인 박해나 핍박도 받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사람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세상 권세의 본질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려는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힙니다. 악한 세상 권세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차원에서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난의 장소이며 역경의 시기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짐승과 같은 세상 권세로부터 지금 우리가 겪는 대표적인 환난이나 역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입니다. 그야말로 누구도 환난이나 역경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말씀하고 있는 짐승과 같은 악한 권세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힘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박해하거나 핍박하지 않습니다.


환난이나 역경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생명의 위협, 물리적 폭력,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어지는 것만 환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험한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우리 시대의 환난이며 역경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게 만든다면 돈이 환난이고 역경입니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면 성공과 출세가 환난이고 역경입니다.


초대교회가 겪었던 교회의 위기가 무엇이었습니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와 핍박을 통해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황제숭배를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로마제국으로 여러 가지 혜택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초대교회와 교인들은 짐승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황제숭배를 거부하며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엄청난 희생과 핏 값으로 지켰던 것이 지금의 교회의 역사입니다.


박해와 핍박, 환난과 역경으로 초대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탄마귀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박해와 핍박으로는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탄마귀가 선택한 새로운 전략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가르침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삶, 편안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좋은 삶을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변질시킵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고, 만사가 형통한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엉뚱한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교인들의 욕심과 탐욕을 적당해 채워주는 것으로, 교회의 욕심과 탐욕을 적당히 만족시켜주는 것으로 하나님과는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게 하고 교회가 되게 만들어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이천 년 교회의 역사 가운데 교회가 가장 예수님의 교회다웠던 시기는 교회가 세상권세로부터 가장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던 때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가장 예수님의 교회와 상관없었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교회에 돈이 넘쳐나고 교회에 세상에 대해 엄청난 권세를 부릴 만큼 교회의 힘이 강력해졌을 때였습니다. 쉬운 예수, 편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넓은 문을 통과하고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좁은 문을 지나고 좁을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교인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신앙의 원칙이며 본질입니다.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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