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2:8--11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1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제목으로 요한계시록 말씀하고 있는 교회개혁과 갱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까지 18주에 걸쳐 말씀드리고 있는 교회개혁과 갱신이란 단순히 교회의 교리나 제도를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것이란 우리의 탐욕을 위해 함부로 왜곡하고 변질시켜버린 잘못된 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착각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교인들이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막연하게 기대하고 바라는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그런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자기들이 소원하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 줄 메시아로만 믿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생각과 내가 바라는 소원을 믿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내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보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이 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루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과 갱신은 뭐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 저는 이것이 교회의 개혁이며 갱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과연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면 교회를 통해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회복해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고쳐야 할 신앙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단순히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당시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으며, 지금까지 세워졌던,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전 세계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 역시 오늘의 교회들을 위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일곱 교회 가운데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서머나(Smyrn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도시 가운데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도시로 오늘날에는 이즈미르(Izmir)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 에베소 다음 가는 부유하고 번창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서머나가 부유한 도시로 번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서머나가 로마황제 숭배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머나는 황제를 열심히 숭배한다는 이유로 로마제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또한 서머나에는 그 어떤 도시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머나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게 된 이유는 AD 70년경, 로마제국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의 성과 성전을 파괴할 때 많은 유대인들이 서머나 지역으로 피신을 와서는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지역으로 이주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유대교 신앙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 유대인들과 서머나 지역의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는데 그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만 받고 책망은 하나도 받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서머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회에 대한 칭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계2:9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대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던 서머나에서 당시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은 결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할 수 없다며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유대인들이 서머나 교회를 로마제국에 고발하였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자유를 주었고, 기독교인들에게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가했습니다.
당시 서머나 교회가 받았던 핍박과 박해는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극심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 때문에 겪어야 했던 핍박이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로마제국에 고발하여 핍박과 박해를 받게 한 이유는 대단하고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끝까지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교 신앙을 가졌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황제 숭배를 인정하였고 황제 숭배에 참여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믿는 기독교 유대인들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유대교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에 고발한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당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길드(Guild)라는 상인조합 회원이 되어야만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길드라는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과 경쟁상대가 되는 서머나 교회의 유대교 교인들로 하여금 장사를 할 수 없게 방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 교회의 유대교 교인들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어서 극심한 가난과 궁핍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악조건에 높여 있던 서머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가 유대 사람들에게서 비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모든 환난과 궁핍 그리고 비난을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실을 아신다는 말씀이 불편합니까? 위로가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 그리고 비방을 모두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알아주는 것은 매우 큰 위로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알아주는 것은 매우 큰 힘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겪는 억울한 비난을 알아주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는 매우 큰 격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겪은 고통 궁핍 비방을 알아주시는 것처럼 교회 역시 다른 성도들의 겪는 고통, 궁핍, 오해나 비난을 알아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알아주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흔히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면,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여자는 사랑 때문에 살고, 남자는 인정받는 것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여자는 아무리 인정해져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남자는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남자는 인정받을 때 비로소 만족한다고 합니다. 아내가 알아주는 것, 자식이 알아주는 것 이것 때문에 목숨도 거는 것이 남자라고 합니다. 어디 꼭 남자만 그렇겠습니까? 여자 역시 아내의 수고와 헌신을 남편이 알아주기만 해도, 자신들이 알아주기만 해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 어떤 교회보다도 그 어떤 교인들보다도 가난하고 비천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는 서머나 교회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궁핍하고 가난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길 그 어떤 교회보다도 부요한 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부요한 것은 누구나 바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는 부요함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부요함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교회에 원하시는 부요함은 물질의 부요함,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닙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물질적으로 부요하였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을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3: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부자가 있었는데 그 밭에 소출이 너무 많았습니다. 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지어서는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새로 지은 곳간에 모두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를 향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며 부자를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부요함은 세상에서의 부요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부요함은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입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겪는 핍박과 고난과 가난입니다. 이것은 내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어서 겪는 고통이나, 나의 게으름 때문에 겪는 가난이나 궁핍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난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물질의 손해만이 하나님께 부요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난이나 물질적 어려움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이 끊이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만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멈추게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탄마귀는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할 것이며,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은 감옥에 갈 것이고, 너희는 모두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난이나 역경 또는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환난이나 시련 같은 것은 피하고 싶고 내 인생에 없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지나쳐서 예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통해 인생에서 겪게 되는 고난이나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예수 믿으면 모든 고난이나 시련 또는 재난으로부터 면제됩니까? 만약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십니다.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세상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이나 재앙으로부터 면제를 받거나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며 배가 난파되기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타신 배에도 풍랑이 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에도 반드시 풍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풍랑은 계속 됩니다. 예수를 믿어도 영적인 침체, 질병, 인간관계의 아픔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금 겪고 있는 환난과 궁핍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께서는 고난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더구나 교인들 중 몇 명은 감옥에 잡혀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인들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열흘이란 상징적인 숫자로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꽉 찬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열흘이란 의미는 모든 고난을 다 받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결국 서머나 교회가 받는 고난에도 반드시 끝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씀입니다.
열흘이란 서머나 교회가 넘어지지 아니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저들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저들에게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 겪는 환난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은 로마제국의 환난에도 끝이 있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장차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가 겪는 고난과 궁핍을 대처하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장차 겪을 고난이 두려워 피하거나 도망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고난이 닥쳐왔을 때 분노를 품고, 원망을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으로 달라질 상황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가?" 하며 신세타령 하지도 마세요. "복이 있니 없니" 복 타령을 해서도 안 되고, 팔자타령을 해서도 안 됩니다.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죽도록 충성하는 것만이 내게 닥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계2:11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젠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단지 서머나 교회에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단순히 사도 요한이 전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귀가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누구든지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둘째사망’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첫째 사망’과 달리 최후의 심판을 통해 불과 유황으로 타는 저수지에 던져지는 형벌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통해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환난가운데서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하지 않고 환난과 맞서 싸운 성도들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계21:8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말씀을 마칩니다. 인생이 잘 풀릴 때에는 예수님을 아는 어설픈 지식이나 흉내나 내는 외식하는 신앙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환난이나 궁핍이 닥치면 예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이나 흉내나 내는 신앙으로는 도무지 환난이나 궁핍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사탄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우리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고 성장시키는 데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환난과 시험을 통해 우리가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까? 환난을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시길 원하시고 사랑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논리나 지식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내가 겪어야 했던 아픔과 고통을 통해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주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으로 인한 환난과 고난을 함께 겪고 견디고 위로하고 이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교회가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함께 견디고 이기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