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교회개혁과 갱신20-행위로 나타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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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로 나타나는 믿음

요한계시록 2:18--23

 

교회개혁과 갱신 20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요한계시록 말씀하고 있는 교회개혁과 갱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잘못 생각하거나 오해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코 믿음과 행함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오해입니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교인들의 대표적인 잘못된 생각이나 오해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기 때문에 행위나 행함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스스로 믿음이 있거나 좋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도 편지를 보내기를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입술의 고백 또는 마음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면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태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오직 믿음만 중요하고 행위는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 것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정확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로마교회에는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다고 가르쳤고,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율법의 행위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단순히 행위로 단순화 시켜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로마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습니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당시 로마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서 교인들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유대교 출신의 교사들이었습니다. 유대교 교사들은 로마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출신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전통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약시대의 언약이라는 할례를 받을 것을 강요했고, 율법의 규정대로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이 지켰던 여러 가지 율법의 규정을 이방인 출신의 교인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유대교 출신의 교사들은 이방인 출신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기 위해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들은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르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 로마서이며 갈라디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또한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의로워 질 수 없으니 그저 말로 고백하는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인들 중에도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어떤 큰 죄를 지었기에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입니까?


딤전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끊임없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시도하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또 다시 실패하고 마는 인간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결코 의로운 삶을 위해 이것은 아무런 시도나 노력도 없이 그저 말로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고 절박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행동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은혜가 절실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삶에 예수님의 은혜가 절실한 사실을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입으로만 모든 것을 대신하는 립 서비스(Lip Service)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말과 행동, 마음과 삶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말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고백한 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위해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7: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믿는 대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면서 믿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정말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자가 되려는 소원이나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2:17,19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물론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인삼아 살려고 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며 한계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욕심을 믿고 내 탐욕을 따라 살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한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과,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또 다시 고백한 대로 살려고 시도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 한 번으로 예수님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의로운 행동 하나로 예수님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예수님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실수도 실패도 없는 완벽한 믿음이 아니라 비록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가운데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두아디라 교회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회복해야 할 신앙은 무엇이고, 고쳐야 할 신앙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칭찬하신 것은 무엇이고 책망하신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칭찬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였습니다. 어떤 행위였습니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이라는 행위였습니다. 섬김이나 오래 참음(인내)은 행위로 생각하지만 사랑이나 믿음은 개념이나 생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과 믿음, 섬김과 오래 참음을 모두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신앙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행위보다 갈수록 그 신앙의 행위와 태도와 모습이 갈수록 더욱 좋아졌다고 칭찬하셨습니다.


2:19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또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다고 해도 여전히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며 한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실수나 실패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수도 하고 때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반드시 달라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 이전보다 더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이전보다 더 나은 믿음의 행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 역시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주는 영적 도전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결코 완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든 교회마다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두아디라 교인들을 미혹시켜 성적 타락에 빠지게 만들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만드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진리를 지키려고 애쓰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한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지키려고 하다가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유혹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인까지도 용납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며 문제입니다. 진리를 지키려고 애쓰다보면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하게 여기는 일에 소홀하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하게 여기는 일에 애쓰다보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진리를 지키고 바른 교훈을 지키는 일에 소홀하게 됩니다.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충실했던 두아디라 교회는 사람을 품어주는 일을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짓된 교훈과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미혹시키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마저도 용납하고 인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두아디라 교인들 중에는 이세벨의 거짓 교훈에 미혹되어 성적인 타락과 우상 숭배에 빠지는 교인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2:20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세벨은 진짜 이세벨이라고 이름 하는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세벨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세벨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가 된 여자입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믿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가져와 이스라엘 전역에 전파하였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바알 신을 섬기는 백성들로 만들기 위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로 삼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아합의 아내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시대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왕상16:30-31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두아디라 지역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특별히 아름다운 색으로 염색한 옷감과 잘 제련된 놋쇠로 만든 제품을 사고파는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 되려면 길드라는 상인조합에 가입해야 했습니다. 두아디라 지역에서 길드라는 상인조합에 가입하려면 아폴로라는 우상을 숭배해야 했으며 로마황제를 신으로 숭배해야만 가능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이라 불려진 여인은 두아디라 교인들로 하여금 길드에 가입하도록 권면했으며 길드에서 행하는 우상숭배나 우상숭배의 제사의식으로 펼쳐지는 행음에도 참가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두아디라 교인들은 이세벨의 그럴듯한 거짓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인들 대부분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장사를 하기위해선 현실적으로 길드라는 상인조합에 가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교인들을 미혹케 하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인을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책망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책망하고 심판하기 이전에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인에게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고 무조건 그 사람을 내치기전에 먼저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결코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죄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저지르는 일이니 죄를 미워하기 보다는 당장 죄를 지은 사람, 실수를 저지를 사람을 미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쉽지 않으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쉬우면 굳이 믿음까지 필요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어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더 이상 심판을 피할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21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자기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예수님은 잘못된 교훈에 빠져 음행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던 두아디라 교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가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는 고해성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행동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고 해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22-23a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죽게 하겠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잘못을 책망하시며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은 우리의 드러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드러난 행위로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뜻과 마음까지도 보시는 분이라 것입니다.


2:23b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행위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인지 그저 사람에게만 잘 보이기 위한 외식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주 사람에게 속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예수님마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시지만 그 행위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아신다고 경고하십니다. 믿음과 믿음에 따른 행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누구나 믿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이며 잘못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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