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
누가복음 12:13-21
2018년 두 번 째 주일 오늘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유산상속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유산을 때문에 형제간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형이 동생에게 돌아갈 유산까지 차지하고는 동생에게는 아무 유산도 나눠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몫을 찾으려고 이런 저런 방도를 써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 무슨 부탁을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형에게 명령하여 아버지의 유산을 동생인 자신과 나누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부탁하는 대로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문제가 모두 해결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눅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모든 판단과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 또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권위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요즘 애들은 답정너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교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말은 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돕기 위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결론을 내린 해결책을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도와줄 수 있는 전능한 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모든 답을 정해 놓고서는 예수님은 그저 자신이 내린 해결책을 도와주는 분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거나 상담을 해 보면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목사에게 원하는 설교나 상담은 내 인생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목사에게 원하는 설교는 자기가 원하는 말,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목사에게서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말, 듣고 싶은 말을 목사가 설교하면 열심히 아멘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말, 듣고 싶지 않는 설교를 하면, 목사가 은혜가 없다, 영성이 없다,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이미 내 인생의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이 정말 바른 것인지, 내가 가는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배우고 깨닫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계시는가를 배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인생에 대한 잘못된 답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찾아 와서는 예수님은 그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형에게 명령하여 유산을 자신과 나누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책망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 온 사람을 책망하고 꾸짖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이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람의 부탁한 대로 들어준다고 해서 이 사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눅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답을 안다고 하면서도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 예수님을 찾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방식이나 내 해결책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이 내린 답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결정한 방법을 이루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신앙이 조금도 성숙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자신 문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욕심 많은 형이 유산을 독차지 하고는 자신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형이 유산을 나누어 주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형에게 명령하여 자기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모두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 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 사람의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 대부분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는 불행이나 문제를 자기 주위의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애들이 도무지 말을 듣지를 않아서 미치겠어요. 애들이 말만 잘 들으면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아요." "남편이 도대체 변화가 안 됩니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살 것 같아요. 왜 00집사는 저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 집사만 보면 교회 나오기가 싫어요."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 확고히 믿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모두 내 주변 사람들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뀌고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자기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단 한 순간도 평안이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 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내가 변화되지 않고 오로지 내 주변 사람들만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코 자신에게 닥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닥친 문제는 내 문제이지 결코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내가 변해야 남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형에게 명령하여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는 사람을 꾸짖은 예수님께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심을 버려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많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동생의 유산을 독차지한 형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며 동시에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예수님 주변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눅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왜 유산을 독차지한 형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올 정당한 유산을 요구하는 동생에게까지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마도 동생은 탐심을 물리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척이나 억울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탐심은 형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율법이 정한 정당한 유산을 요구하는 자신은 상관없는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산을 독차지한 형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동생 역시 탐심에 사로잡혔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탐심이란 마음의 상태이지 결코 많고 적음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흔히 탐심은 부자들에게나 있는 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도 탐심이 있습니다. 유산을 독차지한 형도 탐심에 사로잡혀 있지만, 형과의 관계를 깨뜨리더라도 끝까지 유산을 찾으려고 했던 동생 역시 심각한 탐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명’ 이라는 말은 단순히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은 진짜 인간다운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산을 독차지한 형도 문제이지만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기껏 부탁한다는 것이 형을 혼내고 자기 유산을 찾아 달라는 동생도 문제입니다. 자기 몫인 유산을 찾으면 동생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사는 집이 너무 넓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은 없습니다. 열이면 아홉은 다 좁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물건이 많아서입니다. 옷장에 옷이 넘쳐납니다. 신발장에 신발이 넘쳐납니다. 더 이상 신발장에 신발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발은 자꾸 늘어납니다. 그런데도 맨 날 입을 옷이 없고 신을 신발이 없다고 합니다. 옷과 신발뿐만이 아닙니다. 부엌에도 그릇이 하나 가득, 냉장고에도 음식이 차고 넘쳐 빈자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려야 합니다.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다 쓸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됩니다. 그런데 남도 주지 못합니다. 아까워서입니다. 결국 자신도 쓰지 못하면서 남 주기는 아까워서 붙들고 있는 것이 온 집안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음식이 썩어 못 먹게 되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썩어 서 버리면 덜 아깝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욕심이 우리의 삶에 가득차서 우리의 삶을 답답하게, 복잡하게, 골치 아프게 그리고 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인생이 불행한 이유를 자신의 소유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이 불행하다 여기는 것은 소유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탐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가 농사짓는 밭에 큰 풍년이 들어 추수한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곡식 창고를 헐고는 더 큰 창고를 짓고는 거기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많은 것을 쌓아 두었으니 여러 해 동안은 걱정 없이 놀고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눅12:17-19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가장 많이 반복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부자가 혼자 말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내가 내 영혼에게” 부자가 하는 문장마다 단어마다 ‘나’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부자는 철저하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창조의 질서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를 위하는 것은 분명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만 위하며 사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부자는 자기를 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에게는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을 위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이웃을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자는 오직 “내가, 내 것, 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웃이 없는 자기만의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도우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혼서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의 존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큰 소출을 거둔 것이 모두 자기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을까요? 부자가 큰 소출을 거두기까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든 성공은 혼자만 잘나서 성공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셨기 때문에 풍년이 왔습니다. 또한 그 큰 농사를 혼자 힘으로 했겠습니까? 물론 품삯을 주고 일꾼들을 고용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일꾼들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잘 나서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의 이웃은 어떻게 되든지, 굶든지 병들든지, 알바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존감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탐심이 자기를 지배합니다. 자기가 돈을 소유한 것 같지만, 돈이 자기를 소유해 버립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탐심에 사로잡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비슷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니 스스로 멈추려고 해도 멈추지 못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연료가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 질주하거나 충돌하여 억지로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은 충돌사고로 멈추게 됩니다. 충돌 사고로 멈추게 되면 자기만 다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도 크게 다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면 그것은 그 사람 혼자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는 기쁨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모두 자기 혼자만 움켜쥐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것보다 더 괘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는 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내가 찾아가버리면 네 것이 전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진짜로 부자의 영혼을 당장이라도 거두어 가신 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진짜로 죽는 경우도 있지만, 비유의 의미는 탐욕을 부리며 살게 되면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아름다운 삶,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진짜 인생을 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 이제 거기서 그만 살고 이리 오라.”하시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찾으시는 순간, 내 소유가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내 돈도, 내 차도,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탐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만큼 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다 여깁니다. 하지만 욕심을 채우지 못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기는 불가능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길을 세상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왜 욕심입니까? 채울 수 없는 것이기에 욕심인 것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욕심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욕심을 채우는 유일한 길은 욕심을 버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길도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올해 우리교회의 영적 목표는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까?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돈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돈은 사람을 결코 만족케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만이 참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반드시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