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
사사기 16:23-30
2018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올 해 우리교회의 영적목표는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교회입니다. 바라기는 예배로 모일 때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어떤 교회가 복 있는 교회인가, 과연 나는 복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우리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요한 한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사람은 누구나 복 있는 삶을 원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원하고, 쾌락을 즐기려는 궁극적 이유도 결국은 복 있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복 있는 삶은 모든 인간 활동의 최고의 가치이자 최종의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복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할까요? 복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자 사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의무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헷세는 “행복해진다는 것”이라는 시에서 인생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본능이나 의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성경은 이것에 대해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본능은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사명이라고 한다면 복 있는 삶을 사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창5:2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복되게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복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물으면 자신 있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단과 목적이 바뀐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돈이 행복입니까? 성공이 행복입니까? 쾌락이 행복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 성공, 쾌락이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돈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모든 부자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럼 정말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행복할까요? 만약 성공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은 모두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출세하고 성공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나 성공 또는 쾌락은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이것이 행복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이 많으면, 성공을 하면, 쾌락을 누리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하며 돈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인생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수단을 어떻게 사용해야 복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수단을 목적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절대로 그 인생은 복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삽니까? 살기 위해 돈을 법니까?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하고도 불행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어야만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 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이 같을까요? 아니오.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해서 그랬는지 동전 줍는 꿈을 자주 꾸곤 했습니다. 비슷한 꿈을 하도 많이 꾸어서인지 지금도 생생하게 그 꿈을 기억 합니다. 꿈에서 친구들과 다리 및 개천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리 밑 모래 더미에서 100원 짜리 동전이 보이는 것입니다. 웬 횡재냐 싶어 동전을 모래 더미에서 줍자 모래더미 옆에서 또 동전이 나오는 거예요. 모래 더미를 파니까 돈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동전을 양 호주머니에 터지도록 집어넣어도 계속 돈이 나오니까 친구들과 놀 생각도 못하고,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동전 줍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신이 나서 동전을 줍고 있는데 어머니가 깨우시는 거예요. 학교 갈 시간 됐다고 그만 일어날고 깨우시는 것입니다. 잠에서 깬 저는 제일 먼저 주머니를 확인해 봅니다. 아무리 주머니를 헤집어도 거기엔 동전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비록 꿈이지만 너무 아쉬웠습니다. 비록 꿈이지만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열심히 주은 동전으로 맛있는 군것질도 못하고 그저 동전만 줍다가 잠에서 깬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너무나 아쉽고 섭섭한 마음에 다음에 또 동전을 줍는 꿈을 꾸면 딱 한 주머니만 채우고 얼른 마트로 가서 군것질도 하고 장난감도 사는 꿈을 꾸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또 동전을 줍는 꿈을 꾸면 파면 팔수록 계속 나오는 돈에 정신이 팔려 동전만 줍다가 꿈에서 깨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동전 줍는 꿈을 꾸면서도 단 한 번도 주은 동전으로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을 하거나 장난감을 사지 못했습니다.
돈만 벌면 행복해 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도 돈만 벌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그 인생의 전부이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면 행복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은 사람을 절대로 만족케 못합니다. 늘 부족하게 느끼고 더 가지도록 욕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벌 시간만 있지 행복을 누릴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전5:10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반면에 복 있는 삶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려가며 돈을 벌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목적이 아니라 복 있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에 정당한 방법과 수단으로 벌지 않은 돈은 자신을 복 있는 삶을 살게 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요한 만큼의 돈만 벌면 만족해하며 필요 이상의 돈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복 있는 삶을 위해 돈을 잘 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자 사명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버는 돈을 가지고 복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은 삼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삼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또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토르처럼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가진 천하장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삼손에게 엄청난 괴력을 능력으로 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으로부터 침략을 당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주신 엄청난 힘을 주셔서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블레셋을 대적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혼자서 나귀 턱뼈로 무려 일천 명이나 되는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사15:15-16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삼손은 그야말로 당대에 그 누구도 이길 사람이 없었던 가장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 등장하고 있는 삼손의 모습은 가장 비천하고 가장 불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 가장 비천하고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블레셋에게 잡혀서는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서는 맷돌을 돌리는 조롱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삼손을 그토록 비참한 인생이 되게 만들었습니까?
삼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가진 엄청난 힘으로 인해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사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힘이 있었기에 원하는 것은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삼손은 자신이 가진 엄청난 힘으로 인해 세상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비록 삼손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가 가지지 못한 한 가지로 인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가지지 못한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삼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힘센 블레셋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센 블레셋을 물리치기 위해 삼손에게 엄청난 괴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에게 주신 힘을 어떤 일에 사용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엄청난 힘으로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얻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데릴라라는 여인과 쾌락을 누리는 일에 자신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은사로 주셨습니다. 만약 삼손이 자신을 향한 사명을 잃지 않았다면 그에게 주어진 엄청난 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매우 귀하게 쓰여 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사명을 저버린 채 살았습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사용했습니다. 사명을 상실한 삼손의 거룩한 힘은 자기 자랑이나 하고 쾌락이나 탐하는 깡패의 힘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삼손은 데릴라라는 여인의 꾐에 빠져서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든 사이 자신의 머리카락이 모두 잘려 나갔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니 그가 가진 힘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손에게서 힘이 사라지자 그는 한순간에 저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머리카락이 잘려버렸기 때문에, 여자 때문에, 아니면 힘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니요. 이런 것들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삼손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것, 이것이 그를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돈을 잃어버리는 것,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명예와 권력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바로 사명을 잃어버릴 때입니다.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거나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힘, 재능, 은사, 물질, 건강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영웅의 모습입니다. 삼손의 양쪽 눈은 모두 뽑힌 채로 놋 사슬에 묶여서는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맷돌을 돌리는 삼손을 찾아와서는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비참한 모습의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을 때마다 삼손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회개하며 눈물 흘리는 삼손, 그리고 조금씩 자라나는 머리칼을 보며 자신의 사명을 다시금 회복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대 역전의 드라마를 준비하셨습니다.
삿16:21-22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어마어마하게 큰 다곤 신전에 모두 모였습니다. 저들은 앞을 보지 못하고 맷돌을 돌리는 삼손을 조롱하기를 원했습니다. 삼손을 조롱하므로 삼손이 믿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믿는 다곤 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비웃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리며 조롱 받았던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엄청난 힘을 주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힘을 통해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 즉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다시금 자신을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는 다곤 신전의 두 기둥을 무너뜨려 다곤 신전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삼손은 다곤 신전에 모인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 때 삼손이 죽인 블레셋 사람이 그가 살아생전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힘을 잃고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된 삼손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도전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남들 보다 탁월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들 보다 좋은 백그라운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비천하고 초라한 삶을 사는 것 아닙니다. 소유한 것이 적어서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게 압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모르거나 잃어버리고 나니까 가진 것 모든 것이 가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가진 것마저 잃어버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렸기에 비천하고 초라한 그리고 실패한 인생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명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사명이라고 하면 목사가 되거나 교회 일을 하거나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명이란 단순히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나 선교사의 일을 한다고 그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사나 선교사 중에는 그저 돈과 성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을 단지 목사라고, 선교사라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명이 되게도 하고 그저 돈만 버는 일이 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느냐 입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느냐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명이 되게도 하고 돈이나 명예 또는 쾌락을 위한 그렇고 그런 일이 되게도 만듭니다. 삼손이 나귀 뼈로 블레셋 일천 명을 죽이고, 블레셋을 여자를 탐하고 괴롭힌 것을 가지고 삼손이 사명을 감당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매우 부끄러운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수도원의 조리사였던 로렌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수도사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하는 예배와 기도와 성경공부가 사역이며 사명이고, 로렌스가 하는 일은 하찮은 허드렛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로렌스는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일했던 로렌스는 수도원의 어느 성직자보다 더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6: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목사인 제가 돈과 성공을 위해 목회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일을 하는 사명으로 목회하기를 바라십니까?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돈과 성공을 위해 목회해야 복 있는 사람이 될까요? 아니면 사명을 위해 목회해야 복 있는 사람이 될까요? 이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사명을 따라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러분이 복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교회가 복 있는 교회입니까? 저는 이 질문에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사명을 따르는 교회가 복 있는 교회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명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까?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교회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위한 거룩한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