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사람
마태복음 5:3-10
오늘은 팔복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로 1월 첫 주부터 시작하였던 복 있는 사람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마칩니다. 복 있는 사람이라는 시리즈 설교는 오늘로 마치지만 올 한해를 지내며 교회로 모일 때마다 “과연 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있는가?” 끊임없이 묻고 질문하며 올 한 해 동안 신앙생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더 많은 돈을 벌길 원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성공하기를 바라며,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또한 더 많은 쾌락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돈이나 성공, 명예나 명성을 얻거나 쾌락을 누리며 살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그토록 돈과 성공 명예 또는 쾌락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돈, 성공, 명예, 쾌락과 같은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하며 공통적인 이유는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본능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사명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해 “행복은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목적이고 인간 존재의 목표이며 이유다.”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본능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의 원리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사람에게 주신 것은 복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복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복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삶,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1:27-28a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복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소원이며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창조의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빼고는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막상 복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려고 하면 가뭄에 콩 나듯 찾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원하기만 했지, 어떻게 해야 복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어디에 복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무엇이 복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방식으로 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엉뚱한 것을 통해 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나 잘못된 방식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제대로 된 복을 누리거나 얻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원초적 본능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복을 주기고 그 복을 누리며 살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람이 복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살며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교인들조차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방식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세상이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세뇌하고 있는 행복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성공주의와 쾌락주의입니다. 성공주의는 미래의 성공에 인생의 행복이 있다고 믿고 현재의 삶을 희생하더라도 오직 미래의 성공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공주의가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쾌락주의자는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미래의 삶이나 다른 사람의 삶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주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행복의 방식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성공이야말로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출세가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였을 때 비로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했던 모든 일들 이를테면 학창시절에 해야 했던 공부나 운동, 직장에서 했던 업무들은 모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공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해야만 비로소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1등을 해야만, 금메달을 따야만, 최고가 되어야만 행복해질 거라 믿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물론 미래의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성공해야만 비로소 자신은 행복할 수 있다는 성공주의는 잘못된 믿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공해야만, 1등을 해야만, 최고가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만 내려놓아도 우리는 오늘 현재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가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는 깨달음만 있어도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오늘 누려야 할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10년 뒤의 어느 날과 오늘 중 어느 날이 내게 더 중요합니까? 지금 내가 사는 인생은 오늘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지, 오늘 불행한 사람이 내일 행복해 질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누가 사람이냐?”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상을 믿는 것은 단숨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일평생에 걸친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결과만 하나님께 드리려는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우리 인생의 행복은 결국 대부분이 길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성공주의는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결과만 좋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을 수만 있으면 과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상만 사랑하는 사람은, 성공만 원하는 사람은 설령 정상에 오른다고 해도 오래 있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정상을 지키려는 욕심에 정작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도 행복하지만 내려오는 길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성공한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가르칩니다. 제가 자주 반복하는 말인데 성경에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출세란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좋은 또는 비슷한 의미의 선한이라는 단어는 300번이 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성공한 사람을 만드는데 있지 않고 좋은 사람 또는 선한 사람을 만드는데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지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좋은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공한 크리스천은 없습니다. 마찬가지고 좋은 목자 선한 목자는 있어도 성공한 목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 행복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사람이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공주의 다음으로 행복을 위해 가장 많이 시도한 방법은 쾌락주의입니다. 괘락주이란 괘락을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며, 당장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미래의 삶이나 다른 사람의 삶에 피해를 주는 것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추행이나 성폭행과 같은 것입니다. 성공주의와 성공이 같지 않은 것처럼 쾌락주의와 쾌락은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쾌락이 무엇입니까? 쾌락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쾌락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픈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즐거움을 얻습니다. 피곤하거나 졸린 사람이 잠을 자면 즐거움을 얻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가진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므로 얻게 되는 즐거움을 쾌락이라고 합니다.
쾌락이라고 하면 일부 기독교인들은 거부감을 가집니다. 하지만 쾌락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육체의 욕구를 멀리하고 오직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금욕적인 삶을 기독교 신앙의 경건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즐거운 일을 멀리할수록 거룩한 사람이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엄청난 불신앙입니다.
쾌락이 죄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누려야 할 당연한 욕구입니까? 쾌락은 죄가 아니라 사람이 누리도록 하나님이 주신 당연한 욕구입니다. 성경은 결코 인간의 욕구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절제와 금욕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영혼만 귀하고 인간의 육체나 물질이나 현실을 다 악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죄가 됩니다. 이런 신앙을 금욕주의라고 합니다. 금욕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주신 욕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욕구를 충족시켜 즐거움을 얻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욕구나 쾌락과 관련하여 사람이 저지르는 심각한 죄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필요 이상의 것을 욕심낸다는 것입니다. 욕구를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Needs라고 합니다. Needs를 다른 말로 하면 필요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쾌락이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 이상을 욕심내거나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배가 고파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필요한 만큼 적당히 먹으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욕구는 결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욕구가 모든 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입니까? 필요를 채우려고 주신 욕구가 필요이상을 채우려고 할 때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욕구가 아니라 욕심이며 탐욕입니다. 이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벧전4:3 여러분은 지난날에 이방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였으니, 곧 방탕과 정욕과 술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무분별한 우상 숭배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H. Maslow)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로 인간의 생존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식욕, 성욕, 수면, 배설 등의 욕구를 말합니다.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빵 한 조각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배고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다른 욕구는 결코 나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2단계는 안전의 욕구(Safety Needs)입니다. 이것은 위험이나 고통으로부터 안전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명의 안전을 비롯하여 건강, 재산, 가정, 안정적인 직업 등 삶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구를 말합니다. 3단계는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욕구라고도 하는데,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동료 간의 친교와 이성간의 교제 또는 결혼을 추구하게 됩니다. 4단계는 존경의 욕구(Esteem Needs)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입니다.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입니다. 이것은 인간다움 또는 자기다움이라는 가치를 이루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4단계까지의 욕구를 결핍욕구(Deficiency Needs)라고 해서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하는 욕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는 존재욕구라고 해서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욕구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키려는 욕구라고 합니다.
매슬로우는 1단계 욕구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종류의 결핍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이 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자아실현의 욕구는 생리적 요구 못지않게 매우 본질적인 욕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록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매슬로우의 이론에 의하면 어떤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 같습니까? 생리적 욕구입니다. 반대로 가장 충족하기 어려운 욕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럼 어떤 욕구를 채울 경우 사람이 가장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할 때입니다. 반대로 욕구를 충족해도 그 만족의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은 무엇입니까? 생리적 욕구를 충족할 때입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은 사람은 왜 등 따뜻하고 배부르다고 행복하지 못한가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결핍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성장 욕구 또는 존재 욕구라고 하는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해야 비로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며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행복해 집니다.
저는 이것을 복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원리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때는 결핍된 무언가를 채우는 쾌락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사람이 본능과 욕구만 가진 동물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때, 사람이 사람다움을 회복할 때 사람은 비로소 가장 행복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에 관하여 세상이 추구하는 복과 교회가 추구하는 복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복과 교회가 가르치는 복이 결코 같지 않습니다. 복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세상이 가르치는 행복에 관한 이론으로는, 지금까지 인류가 시도한 행복에 관한 시도로는 사람은 절대로 제대로 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정말 행복의 길로 들어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제시해 주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복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복에 대해 분명히 세상의 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말하는 복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복의 가장 중요한 차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세상이 추구하고 가르치는 복은 대부분 외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이든 쾌락이든 외부의 것을 통해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은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복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고 내가 얼마나 변화 되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에 대해 가르쳐 주신 팔복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복에 대한 유일한 예수님의 가르침 어디에서도 무엇을 소유하거나 어떤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또는 복이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이 추구하고 가르치는 복은 늘 제한적입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가지고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누구나 성공을 하고, 누구나 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쾌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 누가나 누릴 수 없는 희소성을 가지고 세상은 행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복은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신 팔복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복된 삶을 삶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