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교회
요한계시록 3:1-6
오늘부터는 2017년 연말까지 설교하다 중단했던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설교를 계속 합니다. 오늘은 교회개혁과 갱신 21번째 시간으로 “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교회”라는 제목으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이천년 전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 문화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따라서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는 단순히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세우신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일곱 교회가 상징하는 것은 지금까지 세워졌던,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전 세계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 역시 단순히 일곱 교회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셔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교회들 더 나아가 앞으로 세워질 모든 교회들을 위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회복해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고쳐야 할 신앙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올 해 우리교회 영적 목표는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교회입니다. 지난 팔주동안 살펴보았던 복 있는 사람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셨던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원리로 복 있는 교회는 한 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복 있는 교회란 한 마디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람을 더 복 있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보다 더 교회를 복 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개혁과 갱신이라고 하면 여전히 많은 교인들이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개신교회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종교 개혁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개혁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살펴볼 사데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을 죽은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을 통해 만들어진 개신교회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여 개혁과 갱신을 중단하는 순간, 사데 교회처럼 더 이상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라 죽은 교회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과 갱신은 교리를 바꾸거나 제도를 바꾸는 것처럼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것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개혁이며 갱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교회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했던 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면 교회를 통해 내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사데 교회가 있었던 사데라는 도시는 상업이 발달하고 염색이 발달한 매우 부요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특별히 주변이 요새와 같이 암벽으로 되어있어 역사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던 도시라고 합니다. 이런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사데 교회는 다른 소아시아의 교회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의 박해나 유대인들의 핍박도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우상숭배나 교회에 침투한 이단사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사데 교회는 이러한 어려움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환난도 시험도 핍박도 없었던 형통하고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의 그 어떤 다른 교회보다도 가장 좋은 환경과 형편에 놓여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들의 교회야말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 가운데 가장 괜찮은 교회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에 대한 주변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라는 평판을 들을 만큼 꽤 괜찮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데 교회에 대한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사데 교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비록 사데 교회가 교인들과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죽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교회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었다는 것은 몸은 있으나 그 몸에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몸만 있고 영혼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 교회라는 형식이나 제도는 있지만, 교회라는 형식과 제도에 담겨져야 하는 신앙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것이 없는 좋은 교회처럼 보였습니다. 교회라면 마땅히 해야 할 여러 가지 종교 행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종교 행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데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이것은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3장 2절 말씀의 후반부입니다. 사데 교회의 종교 행위가 비록 자기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거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들의 종교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옳지 않게 여기신 것입니다.
계3:2b 네가 행한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래도 옳지 않다.(현대어)
사데 교회처럼 자기 스스로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종교 행위처럼 보이지만 정작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옳지 않게 여기시는 종교 행위를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show off)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해 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고 실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신실한 척 흉내만 내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마23:13,15,23,25,27,29(6번을 반복하여 말씀하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은 외식하는 신앙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외식하는 신앙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셨습니까? 외식을 통해서는 신앙을 통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영적성숙과 변화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이 바뀌면,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고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에 변화가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영적성숙이며 변화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 눈에 보이는 행동만 바뀐 척합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생각이 변하지 않고,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사람 눈에 보이는 행동만 바꾸는 것으로는 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매우 큰 스트레스가 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힘이 들고 부담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로운 사람이 되지 않고 의로운 척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 믿음 있는 척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외식의 문제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전히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가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심각하고 중요한 욕구입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외모와 몸매에 집착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돈이나 성공에 집착하는 이유도 결국은 남들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인정받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의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자녀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숨겨진 속마음은 자식의 성공을 통해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물론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욕구가 결코 잘못된 것이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쳐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신앙훈련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외모가 아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자신의 내면을 성숙케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 위한 영적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초점을 두어야 할 영적훈련이 자꾸만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분명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추구하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 다를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많으며, 반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이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태반인 것이 세상입니다.
믿음은 이런 세상에서 누구의 인정을 받을 것인가를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 세상을 바꾸는 믿음입니다. 남이 인정하든 안하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면 옳은 것이고, 잘못된 일을 했다면 잘못한 것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옳은 게 틀린 게 되지 않고, 남이 알아준다고 틀린 게 옳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정말 내가 가는 길이 옳다면 끝까지 그 길을 가는 용기가 곧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원한다면 남의 시선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이 인정해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앞선다면, 옳은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인정받기 위한 일을 하게 됩니다. 남들이 ‘잘 한다’고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가진 함정이며 유혹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인정욕구가 앞서게 되면 자기 믿음의 성장과 속사람이 성숙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인들로 가득한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 가운데 유독 사데 교회만 죽은 교회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앞서도 설명을 드렸지만 사데라는 도시는 지리적 영향으로 외부의 침략이 없었던 평화롭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의 박해나 유대인들에 의한 시련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환난도 시험도 핍박도 없었던 형통하고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문제도 시련도 시험도 핍박도 없다보니 저들의 신앙도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사라진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잘 풀릴 때에는 예수님을 아는 어설픈 지식이나 흉내나 내는 외식하는 신앙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련이나 박해나 환난과 같은 어려움이 닥치면 예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이나 흉내나 내는 외식하는 신앙으로는 도무지 인생의 시련이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처럼 극심한 박해나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교회를 뒤흔드는 이단 사상이 침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절실함이나 간절함을 사라지고 교회의 평판이나 자랑하는 외식하는 죽은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살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교회였던 사데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처방전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착각하기를 회개라고 하면 자신이 잘못한 죄를 고백하는 것쯤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매주일 똑같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하나님께 고백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회개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잘못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내가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계3:3a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어떤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까? 살아 있는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려 올라가듯이 살아 있는 신앙도 악과 싸우고 유혹과 싸우고 시험과 싸우면서 전진합니다. 어려움과 싸우는 가운데 신앙은 더 힘을 얻고 강해집니다. 그러나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 경계를 풀게 되고 점점 안일에 빠지게 되며 나중에는 겉모양은 살아 있으나 실제 생명력은 다 상실한 죽은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때는 가장 평안하다고 할 때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때입니다. 평안할 때야말로, 내 인생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길 때야 말로 가장 위험한 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3:3b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사데 교회를 향하여 살았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절망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데 교회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을 성적 타락에 빠지지 않은 사데 교회 교인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데 교회를 죽은 교회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 단순히 성적 타락이 아닌 외식하는 신앙이었다고 한다면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은 외식하는 신앙에 빠지지 않은 신실한 성도를 의미한다고 여기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계3:4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은 사데 교회에도 비록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나 강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용하시기 보다는 적은 사람, 약한 사람 기뻐하시고 저들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나 강한 사람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고 적은 소수의 사람이나 약한 사람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의인의 숫자는 겨우 열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열 명도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망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는 데에는 많은 교인들이 또는 많은 교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단 몇 사람의 교인만 있어도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사람에게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교회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