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능력으로 지켜낸 믿음
요한계시록 3:7-13
교회개혁과 갱신 2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을 “작은 능력으로 지켜낸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빌라델비아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가 그리고 우리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회복해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고쳐야 할 신앙은 무엇인지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극심한 박해와 핍박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전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교회는 칭찬과 함께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칭찬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책망과 교훈만 받은 교회도 있었습니다.(사데, 라오디게아) 반면에 어떤 교회는 책망은 하나도 없고 오직 칭찬만 받았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서머나 교회와 함께 예수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오직 칭찬만 들었던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었던 빌라델비아 도시는 지역의 이름이 가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미국 동부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는데 잘 알다시피 빌라델비아는 필로스(philos)와 아델포스(adelphos)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형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특별히 이 도시가 형제 사랑이라는 빌라델비아로 불리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의 왕이었던 에우메네스(Eumenes)는 전쟁에 나갈 때 자신의 동생 아탈로스(Attalos)에게 나라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에게 나라를 맡기고 전쟁을 나가자 여러 신하들이 형을 배신하고 동생을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려고 그를 충동질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생은 신하들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끝까지 형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아탈로스의 형제애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을 기념하여 빌라델비아라는 도시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 빌라델피아 지역에는 두 가지의 큰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진이 유난히 많았고, 다른 하나는 포도주 생산의 주산지였다고 합니다. 포도주가 그 지역의 중요한 자원이어서 빌라델비아 도시 사람들이 가장 숭배했던 신은 '디오니소스'(Dionysus)라는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술을 맡아 주관하는 술의 신이었습니다. 로마 신화에서 술의 신은 바쿠스(Bacchus)라고 불렸으며, 바쿠스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명한 박카스라고 알려졌습니다.
지진이 많고 포도주가 발달하다 보니 빌라델비아 도시는 자연스럽게 방탕과 향락이 도시 전체를 지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방탕과 향락의 도시에 세워진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상 풍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굳건히 지켰던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빌라델비아 교회는 로마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유대인들의 방해와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교회보다 잘 지켰으며, 로마제국과 유대인들의 박해와 핍박에도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배교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열악한 형편과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에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며 축복하기를 저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은 무엇을 상징하며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는 문입니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열린 문을 닫을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누구도 빌라델비아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방해하고 비난하던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으로 하여금 저들 앞에 엎드려 절하며 용서를 빌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지금까지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잘 견디고 인내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으니 장차 모든 민족과 사람들에게 닥칠 시험의 때에 예수님께서 저들을 직접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3:9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계3:9-10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의 말씀을 읽으면서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그토록 만족해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칭찬을 받은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의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들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작은 능력에 있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사이의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마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배당 건물도 크지 않았으며, 교인들의 숫자도 적은 교회였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교인들과 교회재정도 부족했으며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계3:8b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규모나 재정이나 숫자에서 가장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 교회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로마제국의 박해와 유대인들의 방해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큰 능력과 힘을 가진 다른 교회들도 하지 못했던 대단하고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필요 이상의 엄청난 교회재정을 이용하여 필요 이상의 큰 예배당을 짓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건축에 집착하는 교회들을 보면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라 건물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많은 교회들이 많은 교인들을 동원해 교회의 힘이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는 대규모 행사를 하고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숫자나 규모로 교회의 힘을 과시하는 일을 기뻐하실까요? 그렇다면 다윗이 군대 숫자 세다가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삼하24:15 그리하여 그 날 아침부터 정하여진 때까지, 주께서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 가운데서 죽은 사람이 칠만 명이나 되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칭찬하시는 일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 역시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는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많은 능력과 재정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설교한 사데 교회가 그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은 교회라는 평판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왜 사데 교회를 괜찮은 교회라고 했습니까? 그럴듯한 건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재정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교인들도 꽤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사데 교회를 괜찮은 교회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어떤 교회라고 하셨습니까? 살았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 적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지극히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가진 능력이나 힘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들이 가신 능력이나 힘이 적었기 때문에 저들이 믿고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자신들이 믿는 주님의 말씀 밖에 없었습니다. 믿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 밖에 없으니 당연히 그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봅시다. 만약 빌라델비아 교회가 큰 힘과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십중팔구는 사데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교회가 가진 힘과 능력과 재정과 교인들이 많은데 굳이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저들이 의지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힘과 능력과 재정과 많은 교인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권세와 돈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지면, 높은 권세를 가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집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참으로 충실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이 올곧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자기 침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남편 되는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아내로 삼아버렸습니다. 참으로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가장 신실했다는 다윗이라도 큰 권세를 가지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절대 권력을 갖게 되면 절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가뭄에 콩나듯 합니다. 따라서 돈이나 권세나 능력이나 명예가 적은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나 권세나 능력이 없어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 가장 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빌 게이츠나 이건희 회장쯤은 안 되도 그의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정도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릴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언제 가장 심각하게 타락했습니까? 환난과 고난 때문에 교회가 타락합니까? 아닙니다. 환난과 고난은 교회를 더욱 순결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때는 대부분 교회가 엄청난 부와 권세를 차지했을 때였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끝없이 부패와 타락에 빠지게 된 것도 지나치게 교회의 힘이 컸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가 죽은 교회가 된 것도 힘이 넘쳤기 때문이며, 라오디게아 교회가 벌거벗은 교회가 된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자랑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가진 로마의 시민권이었습니까? 아니요. 그럼 그가 가졌던 탁월한 성경 지식이나 부였습니까? 아니요. 그럼 그가 예수님께 받은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는 놀라운 은사였습니까? 아니요.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단 한 번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자랑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후11:30 꼭 자랑을 해야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고후12:5 나는 나를 두고는, 내 약점 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기뻐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약할 때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고 불리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고질병이 어떤 질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마다 안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간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의 고질병이 사역에 방해를 줄 만큼 그를 괴롭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고후12:9-10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너무나 자주 하나님께서 강한 자를, 유명한 자를, 부유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가 아니라 세상의 원리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들어 쓰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가진 것이 보잘 것 없다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 없고, 내가 가진 능력이 별 볼일 없는 능력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이 체험했던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작고 적은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군대를 가지고 미디안의 13만 5천의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어린 다윗으로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000명이나 먹고 12광주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베푼 것도 결코 잊지 않고 갚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그래서 함부로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에게도 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형편도 빌라델비아 교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건물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교인도 몇 되지 않습니다. 재정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예수님께 극찬을 들었습니다. 작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작은 능력으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작은 능력으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역설적이지만 저들이 가진 힘과 능력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능력이 적다고 우리 교회가 적다고 낙심할 필요도 절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능력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우리의 작은 능력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됩니다. 우리의 작은 능력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칭찬 받는 성도,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훈이 저와 여러분에게 큰 도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로마제국에 의해 밧모 섬이라는 곳에 유배된 가운데 환상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이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예수님에게 받은 계시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칭찬이며 동시에 책망과 교훈의 말씀입니다.
또한 많은 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계속되는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 결과 배교하는 교인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제국과 타협하는 교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심판이 로마제국과 로마황제에게 임할 것이니 더 이상 로마제국과 네로 황제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교하지 말고 로마제국의 우상숭배와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권고하십니다.
하지만 밧모 섬에 유배되어 로마병사들에게 감시를 받는 사도 요한이 로마제국과 로마황제에게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을 기록해서 편지로 보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로마의 검열로 인해 편지가 전달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편지를 보내는 사도 요한이나 아니면 편지를 받는 교회가 큰 박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말씀을 로마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종의 암호문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