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에 똑같이 주신 예수님의 말씀
요한계시록 3:21-22
교회개혁과 갱신 24번째입니다. 오늘을 “일곱 교회에 똑같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2017년 7월 첫 주부터 교회개혁과 갱신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24번째 설교로 교회개혁과 갱신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설교한 것으로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교회개혁과 갱신에 관한 설교를 마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해서 모일 때마다 교회 개혁과 갱신을 이루어가는 자유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일곱 번의 설교를 통해 사도 요한을 통해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반복하여 설명을 드렸지만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일곱 교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이미 지나간 역사에서 존재했던 교회, 그리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교회, 더 나아가 앞으로 존재할 모든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교회가 끝까지 지켜야 할 믿음은 무엇이며, 회복해야 할 믿음은 무엇이며, 고치거나 버려야 할 잘못된 믿음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결론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마다 다 달랐습니다.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았지만 책망도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만 받고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은 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았습니다. 일곱 교회들마다 저들이 받은 칭찬이나 책망은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일곱 교회에 서로 다른 칭찬이나 책망을 하시면서도 일곱 교회에 공통적으로 똑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계2: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에베소교회)
계2:11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서머나교회)
계2: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버가모교회)
계2:29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두아디라교회)
계3:6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사데교회)
계3:13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빌라델비아교회)
계3: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오디게아교회)
계2:7 이기는 사람에게는(에베소교회)
계2:11 이기는 사람은(서머나교회)
계2:17 이기는 사람에게는(버가모교회)
계2:26 이기는 사람(두아디라교회)
계3:5 이기는 사람은(사데교회)
계3:12 이기는 사람은(빌라델비아교회)
계3:21 이기는 사람은(라오디게아교회)
하나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에 일곱 번 반복하신 두 가지 말씀은 모든 교회들이 그 어떤 말씀보다도 더욱 주목해서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말씀보다도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에 공통적으로 반복하신 두 가지 말씀으로 교회개혁과 갱신 시리즈 설교의 결론을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 모두에게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과 비슷한 의미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복음서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은 모두 전달하려는 의미는 같습니다. 복음서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든 성령의 말씀이든 말씀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이 자신이 들은 말씀을 깨닫는 것은 아니라는 똑같은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비록 똑같은 말씀을 함께 들었다고 해도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아무리 들어도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11:15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막4:9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막4:2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자신이 가진 신앙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통해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이 얻으려는 욕심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 대표적인 종교인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꼬투리 잡아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만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 편견, 욕심을 깨지 못하면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은 복음서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비슷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은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반면에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요한계시록의 예수님 말씀은 모든 사람에 초점이 있습니다. 귀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잘 지켰던 교회들에게만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책망만 들었던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믿음을 잘 지켰던 사람뿐만 아니라 믿음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잘 믿는 사람들만 들어야 하고 들려지는 비밀스러운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모든 교회 모든 교인들 심지어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들으려고만 한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만 하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음성은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지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만 한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고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제 개인적인 주장일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신 거룩한 성령이 임재하신다고 믿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 안에 임재하고 계시는 성령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내 안에 임재하고 계시는 성령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임재하실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구원과 죄 사함의 은혜를 이미 베풀어 주신 것처럼 성령 역시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임재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물론 비 기독교인들은 자신 안에 거하는 거룩한 존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 기독교인들은 자신 안에 거하는 거룩한 마음, 선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힘이 성령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이것을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죄된 본성을 지낸 타락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람의 이기적이이고 탐욕스런 본성과는 전혀 다른 거룩하고 선한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임재하고 계신 성령의 매우 희미한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롬9: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우리가 참 인간다운 삶, 존귀한 삶, 존엄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비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다운 삶, 존귀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라고 세뇌하는 세상이 소리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들여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욕심을 이루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신 거룩한 성령의 음성은 듣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희미하게 들리는 양심의 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처럼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이 결정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도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타락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살았을 때, 저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나타나 하와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려는 뱀의 말을 하와가 듣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뱀의 말을 듣게 되면서부터 사람은 타락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흔히 하는 농담으로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잘 들어야 하는 말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네비게이션이 하는 말을 잘 들으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부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여자는 뱀의 말을 듣고, 남자는 뱀의 말을 들은 여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나이가 들수록 귀 기울여야 하는 말은 아내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왜 말을 안 듣느냐고 잔소리하기 이전에 과연 내가 하는 말이 뱀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는 것인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나이 들어서도 아내에게 큰 소리 치거나 잔소리 할 수 있는 남편은 별로 없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말하기보다 먼저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행동하기보다 먼저 들어야합니다. 그런데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먼저고, 듣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먼저가 되니까 교회가 자꾸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제 갈 길로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도무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이야기만 말하기에 바쁘고, 자기 욕심을 비전이라고 포장하여 행하기에 바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고만 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말, 자기에게 유리한 말, 자기에게 편한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자꾸만 하나님 원하시는 교회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이기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일곱 교회에 똑같이 하신 말씀입니다. 칭찬만 받은 교회든, 칭찬과 함께 책망도 받았던 교회든, 심지어 책망만 받은 교회에도 똑같이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이기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하신 약속은 교회마다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일곱 교회에 공통으로 말씀하신 이기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이긴다는 것이 또는 이기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이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큰 성공을 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것을 세상을 이겼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기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박해와 핍박에 시달려야 했으며 거짓 교사들로부터 수많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경제적인 손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같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 믿는다고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온갖 고난과 박해와 손해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기는 사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기는 사람이란 성령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고난이나 핍박에도, 어떤 손해나 어려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짓밟고 승리함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이나,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우뚝 서는 방식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역설적이지만 교회는 세상에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며, 세상이 주는 미움과 박해로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방식이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는 말씀은 교회가 타락해서 또는 목사나 교인들이 잘못해서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과 멸시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교회와 목사 그리고 교인들의 타락과 잘못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과 멸시를 마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인양 착각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미움과 멸시이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못하고서 받는 질책을 마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여기는 것을 요즘 애들은 정신승리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또라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타락에 대한 세상의 비난과 경멸은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교회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교회가 끝내 이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앞으로 교회는 그 어떤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는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이 바른 길을 가므로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고 세상의 악함과 타락을 고발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환난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시므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니까 이기는 자에게는 세상을 통해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신령한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자는 것은 뭐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처럼 신앙의 가장 기본을 회복하는 것이 곧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가장 기본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어떤 손해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당장은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기는 사람 즉 끝까지 말씀을 지키는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켜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시는 진짜 복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