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강해1-하나님의 형상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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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1.mp3

하나님의 형상과 구원

창세기 1:26-28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로 몇 번에 걸쳐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우리교회에서 매주일 예배 때마다 빠지지 않고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입니다. 언제부터 이 찬양을 언제부터 불렀는가를 지난 주보를 찾아가며 확인해 보니까 2012년 말부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7년째 주일예배 때마다 이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매 주일 똑같은 찬양을 반복하여 부르니까 제발 찬양을 바꾸자는 의견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마 말은 안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번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찬양을 아직까지 바꾸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매주 자유교회 예배를 인도하는 저에게 있어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영성을 가지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려는 마음과 믿음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찬양하고, 설교 때마다 그토록 자주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자세하게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저 막연하게만 알고 있지 창세기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영적도전은 무엇인지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나 교인들의 간증이나 전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전엔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가 대표적인 전도 구호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가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역시 구원이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구원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이 예전처럼 절실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가 그리고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고 누리고 드러내고 증언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구원입니다. 구원이 없는 기독교, 또는 구원이 빠진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1:21, 3:17)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조차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12:47)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여주신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1:16)


1: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는 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2:47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1:16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습니다. 성경이 심판에 대해 말씀하는 이유는 오로지 구원을 위한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심판이 있는 것과 심판 받지 않기 위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가르침임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더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보다는 종말의 심판을 더 강조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뜻보다 심판을 더 강조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구원으로는 전도도 잘 안되고 교인들도 통제하기 힘드니까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모으고 교인들을 통제하기 위함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이비 이단들이 이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구 멸망이나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물론 구원이란 것이 기독교 신앙만이 가진 전유물은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이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구원과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은 전혀 다릅니다. 종교마다 사람들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구원을 가르치고 추구하고는 있지만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은 전혀 다릅니다. 구원의 방식도 다르고 구원의 내용도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유통되고 소비되는 구원은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내세우는 교리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종교랑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신을 섬기는 신앙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예수 잘 믿으면 살아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에 간다는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살아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영혼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교회마다 목사들마다 교인들마다 조금씩은 다를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여기에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일까요?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이런 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과연 이런 구원이 다른 종교의 구원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구원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식의 구원은 형식과 모양만 다르지 그 내용은 다른 종교와 심지어 미신과도 다를 게 없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런 식의 구원은 다른 종교들이 가르치고 추구하는 구원보다도 심지어 더 세속적이며 이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식의 구원은 인간이 가진 종교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만족시켜 더 많은 교인들을 만들기 위한 종교 속임수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보다는 좀 더 세련된 형태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고통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살지만 죽으면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라는 낙원에서 영생토록 복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세상에서의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보상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 다른 다른 주장으로는 세상은 악하고 타락한 곳이며, 인간의 육체 역시 타락하고 썩어질 것이기에 세상의 일, 육체의 일에는 상관하지 말고 오로지 죽음 이후에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가는 천국만 바라보며 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죽은 다음 세상과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주장하는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모든 구원론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세상과 천국, 육체와 영혼을 철저히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생각에 근거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천국, 육체와 영혼을 철저히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철학에 기초한 것입니다. 플라톤은 세계를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질료)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형상 Idea)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는 불안정하고 열등한 악한 세계라고 여겼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Idea)을 변하지 않은 영원한 세계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며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했습니다.


정신적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도 플라톤의 철학에 유래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일 수 있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몸은 여기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둘 다 있어야죠. 하나만 있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을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플라토닉 사랑, 플라토닉 희생, 플라토닉 나눔, 몸은 없고 마음으로만 하는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있고 마음은 없는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몸도 있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따로 나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플라톤의 구원입니다.


세상과 천국, 육체와 영혼을 철저히 둘로 나누는 이원론은 플라톤의 철학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도,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아닙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일원론에 근거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육체와 영혼이 둘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하늘과 땅과, 별들과 온갖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육체를 심판하고 파괴하고 멸망시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악한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지 이것들을 파괴하고 멸망시켜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원론 자들의 주장처럼 세상은 정말 악한 것이고 육체는 썩어 없어질 불필요한 것일까요? 세상은 정말 심판받고 멸망 받아야 할 저주받은 곳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하니 세상이 악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육체가 악하거나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타락하니 육체가 타락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고 불안전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고 노화됩니다. 그래서 몸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사랑이나 행동으로는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지 악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약한 것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약한 것은 도와야지 피하거나 멀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26:41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물론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사건은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지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해 홍수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를 통해 방주를 준비하게 하시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까지도 구원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40일간의 대 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고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 다시는 땅을(세상을) 저주하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노아시대의 홍수 사건을 심판에 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뜻은 구원에 있었지 심판에 있지 않았습니다.


8:21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 다는 교회는 자꾸만 세상을 멸망해야 할 악한 것으로만 여깁니다. 육체를 부패하고 썩어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만 여깁니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이기에, 어차피 썩어질 육체이기에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육신의 삶을 바꾸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세상을 떠나 죽어서만 가는 영적인 세계로만 여깁니다.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들이 들어가는 신비하고 영적인 세계로만 천국을 믿습니다. 물론 성경은 영적인 세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를 세상이나 육체와 구별하여 오로지 영적인 세계로만 제한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이 플라톤의 이원론에 갇히게 되면서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 영혼의 문제일뿐이지 내가 사는 세상이나 내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이 땅의 삶이 구원과 연결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남부럽지 않게 부귀영화 누리며 세상 살다가, 구원은 죽고 난 다음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마치 죽음 이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보험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매우 위험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부활하셨을 때도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악하고 타락하여 곧 멸망할 것이니 죽어서 천국이나 가자고 하셨습니까? 아니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가자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하나님의 뜻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예수님의 사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나,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신 사건,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맙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고 한다며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까?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까? 굶주린 자들에게 왜 먹을 것을 주어 그들을 살게 하셨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심지어 죽은 회당장의 딸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오히려 죽도록 도와서 하루라도 빨리 영혼이 천국에 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이 함께였던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과 천국, 육체와 영혼을 함부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면, 구원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육체와 영혼을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로 나누어진 세상과 하나님 나라, 육체와 영혼을 하나가 되는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였으며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 교인들 몇 분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교회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유교회 오기 전에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는데 자유교회 오고 나서는 예전에 가졌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점점 불확실 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분의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하길 내가 설교를 잘하고 있구나, 이분이 진짜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두려움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확신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어야 합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입니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개인적인 주장일지는 모르지만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처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이웃에게서도 그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영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보다 더 위대한 기독교의 구원은 없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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