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창조
창세기 2:1-3
하나님의 형상 시리즈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는 서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구원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고 오늘은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의미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타락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성경은 그 처음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성경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설교했듯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연결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면,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창조를 알아야 합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세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신학의 책이며 믿음의 책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통해 창조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거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창조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창세기라 믿음의 책을 마치 지구탄생에 대한 의문과 인류기원의 역사를 가르쳐주는 역사책이나 과학책처럼 여깁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가지고 아주 오랜 옛날에 우주와 지구가 어떻게 생겨났고 동물과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삼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며 위험한 생각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구의 탄생에 대한 과학적인 정보나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할 뿐이지 창조에 대한 어떤 역사적인 근거나 과학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세상과 인간의 탄생에 대한 과학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지구 탄생이나 인간에 대한 과학적 근거로 삼아 과학자들과 논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문학책을 가지고 과학이나 수학을 가르치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며 계시의 말씀이지 결코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과학의 관점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지극히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처럼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세상과 인간사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해 쓴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다양하고 복잡한 인세상의 역사와 인간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하심, 간섭하심 역사하심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신학책이며 믿음의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과학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처럼 여기거나 주장하는 것은 시집이나 소설책을 가지고 수학이나 과학을 연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창세기가 말하는 것과 과학이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니 성경을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함부로 단정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학은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여러 학문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학으로 세상과 인간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학만으로 세상과 인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도 잘못이고, 성경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니 믿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Fact)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숨겨진 진리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사실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진실, 계시적 진실을 말하는 책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읽게 되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나도 강렬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 나타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 이래 사람들이 바라본 세상은 어떠했습니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창조의 아름다움과 선함 보다는 항상 말세를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함은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은 빨리 심판받고 멸망 받아 파괴되어야 하는 곳으로 여기며 죽어서 가는 내세의 세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인간의 타락입니다.
창1:3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창세기 1장은 6일 걸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비록 매일 마다 창조하신 피조물은 달랐지만 창조에 대한 과정은 모두 같은 구조와 과정으로 되어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면,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무엇이 있으라는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그대로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된 것을 보시고는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곧이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1:9-10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그렇다면 동일한 형식과 구조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 또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는 반복되는 창조의 구조와 과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신학에서 계시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자연을 일반계시 또는 간접계시라고 하고 성경을 특별계시 또는 직접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은 특정한 인간의 언어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고 해서 특별계시 또는 직접계시라고 합니다. 반면에 자연과 자연 현상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일반계시 또는 간접계시라고 합니다. 복잡한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고, 말씀이 현실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계시는 아니지만 간접적인 계시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계시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과 피조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그대로 이루어진 실현된 세상이며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도 하나님의 계시이고, 태양, 달, 별, 바람, 공기, 식물, 동물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말을 통해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영적도전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보이고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자연을 결코 아무것도 아닌 그저 단순한 물질 덩어리로만 여기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세상이나 자연세계는 결코 제멋대로 운행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질서와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태양과 달과 지구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식물들과 동물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세상에 대한 진실입니다. 세상과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곳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에 따라 움직여지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아 자연과 자연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비에 감싸인 두려움의 대상으로 이해하거나, 인간의 힘보다 더 거대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숭배의 대상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늘이 분노하면 홍수로 세상을 휩쓸거나 가뭄으로 세상을 할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섬기고, 태양을 섬긴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오랜 옛날부터 태양을 숭배하고, 달을 숭배하고, 하늘을 숭배하고, 동물을 숭배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신령한 힘이 자연 속에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며, 그런 것들이 연약한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서 숭배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우상숭배의 시작은 두려움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공포가 자연이나 힘센 동물을 숭배하게 만든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우상숭배의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하늘을 섬긴 것이고, 태양이 빛을 내려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태양을 섬긴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기근이나 홍수나 자연의 이변이 발생하면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자연이 우리를 집어삼킬까봐 두려워 떱니다. 물론 요즘은 과학의 발전으로 예전처럼 자연이나 동물 또는 신비한 자연 현상을 더 이상 예전처럼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거대한 자연이나 신비한 자연 현상을 숭배하려는 경향은 남아있습니다.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소원을 빌거나 정월 대보름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자연 숭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하늘과 태양과 달과 지구와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진실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말 예배할 대상은 해와 달과 별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와 달과 별의 힘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시고 창조질서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놀라야 합니다. 따라서 지구가 멈추며 어떻게 하나 염려하거나 태양이 식지 않을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달이나 바다가 우리를 해칠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곳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곳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에도 떨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자연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를 7일의 창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7일이라는 하나님의 창조가 주는 진실과 진리보다는 7일이라는 물리적인 날짜에만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이 말하는 하루가 지금과 같은 24시간의 하루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의문을 가지고 씨름합니다. 물론 이런 의문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정확하게 알거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하루와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3:8)는 말씀으로 여기서의 하루는 천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7일이라는 숫자는 과학적인 의미로 쓰인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쓰인 숫자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창조에 나타난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만듭니다.
벧후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 같은 하루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이 7일 동안의 창조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세상이 단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질서와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서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루에 모든 창조사역을 다 끝내실 수는 없었을까요? 굳이 6일 동안 해야만 하셨을까요?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루에라도 다 끝내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굳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7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안식일이라는 하나님의 영적 질서를 가르쳐주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창조 이야기의 핵심은 6일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께 6일 동안의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일곱 째날 안식하셨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7일간의 하나님의 창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진실과 진리는 안식일입니다.7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조차 일하시던 것을 중단하시고 안식하신 것처럼 사람 역시 6일 동안은 열심히 노동해야 하지만 7일째 되는 날에는 반드시 하던 일을 멈추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땅도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땅을 일구지 말고 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7년이라는 안식년이 7번 반복되는 희년에는 빼앗겼던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셨고, 돈이 없이 종이 되었던 사람들도 풀어주게 하셨고, 빚진 자들의 빚도 탕감하게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의 경제 시스템을 본래의 모습으로 리셋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7일간의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일곱 번 째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을 사람에게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보면 안식일에는 그 어떤 형태의 노동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명령이 얼마나 강력했냐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신 의도 또는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안식일에는 어떤 형태의 노동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내가 내 노동의 결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으로 먹고 산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노동이 없이는 인간의 노동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31:14-15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안식일은 단순히 내가 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자연을 보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깨닫고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단순히 노동을 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즐기는 데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세상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살아가는 세상임을 깨닫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에는 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원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휴식과 안식의 차이를 아십니까? 오늘 쉬어야 내일 일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휴식입니다. 반면에 안식은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즐기는 것이 안식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휴식도 필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인생을 사는 힘이나 기쁨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인생을 사는 기쁨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세상에서 맞이한 첫 번째 날이 무슨 날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던 일곱 번째 날이 사람에게는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의하면 사람은 6일째 되는 날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노동으로 인생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은 또는 일하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은 돈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삶은 출발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본질은 노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즐기는 안식이며 축제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안식이야말로, 축제야말로 삶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안식을 회복하는 것이며, 축제와 같은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 모두의 인생이 기쁨과 감사와 감동과 즐거움, 경배와 찬양이 넘치는 축제와 같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