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한계
창세기 2:15-17
하나님의 형상 시리즈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매주 반복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전혀 다른 상반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라면 창세기 2장 7절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가장 쓸모없는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사람이 얼마나 존귀하고 대단한 존재인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사람을 땅의 먼지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사람이 얼마나 비루하고 비참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2:7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현대인)
몇 주째 반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동시에 땅의 먼지로 지음 받았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먼지로 만들어진 하찮고 비루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또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2장 15절부터 17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으니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엄청난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엄청난 권세에는 매우 중요한 제한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계라고도 할 수 있 있습니다.
창1: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a)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히> 아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엄청난 권세를 주시며 동시에 사람에게 한계를 두신 것은 무엇일까요? 비록 사람에게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세는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세상 모든 만물들을 다스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세상 만물을 다스릴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나타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권세와 재능과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창세기는 이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또는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라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다스리라는 권세는 결코 다스리는 사람 마음대로 제멋대로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다스리라는 권세는 잘 지키는 것이며 잘 돌보는 것입니다.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개역한글)
창2: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새번역)
부모에게는 자기가 낳은 자녀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양육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낳은 자녀라고 해도 내 마음대로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도록 잘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목사의 권세도, 정치가의 권세도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권세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다스리는 권세가 가진 한계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말씀이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시고는 상반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명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사람이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무 열매를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게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무한한 자유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명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제한 또는 한계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창2:16-17a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위대한 신의 대리자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진실을 잊지 말고 살라는 상징과도 같은 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람의 생명이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쳐 줌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피조물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쳐 줌으로 사람이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먹지만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통해서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기억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따라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엄청난 권세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결코 하나님도 아니며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피조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께는 그 어떤 제한이나 한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합니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에는 반드시 생명의 제한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한계나 제한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제한과 한계가 있다는 것이 피조물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제한이 있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물의 한계를 늘 기억하며 살도록 하신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입니다.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금지명령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선과 악이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선을 알게 하는 나무와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과 악은 언제나 함께 짝지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과 악은 분명히 다릅니다. 선과 악은 항상 서로 대립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은 서로 떼어 놀래야 도무지 떼어 낼 수없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한 몸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기쁨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슬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기쁨을 알지 못한다면 슬픔을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배고픔을 모르면 배부름을 알 수 없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슬픔을 모르면 기쁨을 알 수 없고, 배부름을 알지 못하면 배고픔도 알 수 없습니다. 빛만으로는 빛을 알 수가 없어요. 빛은 어둠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어둠은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일 수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선과 악도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악이 없이는 선이 있을 수 없고, 선이 없이는 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얼핏 우리는 선과 악은 뿌리부터 다르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같은 나무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이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과 악은 하나의 나무이지 결코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무가 아닙니다. 선의 나무가 있고 악의 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선과 악은 두 얼굴을 가진 한 몸입니다.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하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나무 열매를 먹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선과 악은 그렇게 혼란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악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때는 선과 악은 사람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어놓은 한계선을 사람이 넘어가는 순간 선과 악은 뒤죽박죽 섞여 사람의 삶을 심각하게 괴롭히는 문제가 되고 맙니다. 사람이 기준이 되어 선과 악을 나누게 되면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 구별하는 것이 매우 혼란스럽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행하는 선은 누군가에게는 선한 일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악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사람이 행하는 악은 누군가에게는 악한 일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선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함 속에 악의 손길이 작동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행하는 악함 속에 선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악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을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또한 없습니다. 우리는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선을 행할 수가 없으며, 양심의 가책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면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고, 악을 행하면서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찜찜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찜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어놓은 피조물의 한계를 무너뜨렸던 사람이 가져야 하는 비루하고 비참한 모습이며 운명입니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지 명령을 내리시며 이 금지 명령을 어길 시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을 사람의 죽음과 연관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악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것은 곧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창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세기가 가르쳐 주는 죽음은 더 이상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추방된 자, 에덴을 상실한 자, 저주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죽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사람의 비극적인 삶입니다. 이 삶은 에덴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다음 곧바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도 이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이기를 거부한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에덴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상징적인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3: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만 피조물로서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또는 동물들이 일정한 한계도 없이 계속 성장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무나 식물들이 일정한 한계도 없이 끊임없이 성장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일정한 한계를 지키지 않고 땅을 뒤엎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구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는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사람에게는 더더욱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래서 신의 대리자라고 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한계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세상은 지옥 그 자체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모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기준이나 중심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인생의 기준이며 중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돕고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져야 존귀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람이 땅의 먼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사람으로서 존귀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어놓은 피조물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며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계를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한계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이기 때문에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을 물리치고 피조물로서 겸손히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지혜를 배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