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강해9-하나님의 형상과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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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9 .mp3

하나님의 형상과 원죄

창세기 3:1-6

 

하나님의 형상 시리즈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형상과 원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31절부터 6절의 말씀은 최초의 인간이라고 하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해 가르쳐 주는 말씀이자 원죄(original sin) 교리의 근거가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원죄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주장하는 원죄의 교리는 인간에 대한 매우 중요한 본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원죄의 교리가 무엇입니까?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주장하는 원죄의 교리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지만 원죄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기독교 교리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원죄의 교리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교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나무열매 하나 먹은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하게 나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먹지 말라고 금하신 나무열매라고는 하지만 나무열매 하나 먹은 것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나무 열매하나 먹은 일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먹지도 않은 그저 최초의 인간이라고 하는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 때문에 자신들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 취급 받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를 믿는 다고 하는 교인들조차 도대체 자신이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기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기독교는 세상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막상 교인들은 원죄의 교리는 알아도 원죄가 무엇인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원죄란 무엇이며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죄를 통해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원죄나 죄에 대해 잘못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아담과 하와가 먹었다는 특정한 행위를 인간의 타락과 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사람을 타락한 죄인으로 만들었고, 죄를 지은 인간이 마침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원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인간의 원죄를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특정한 행위로 제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오게 만듭니다. 인간의 타락과 죄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인간의 원죄를 이해하기 위해선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나무열매를 먹었다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타락과 죄를 특정한 행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죽은 신앙이 되게 만듭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분명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지 창세기가 가르쳐주고 있는 본질적인 인간의 타락과 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은 사건을 통해 창세기가 가르쳐 주고 있는 근본적인 인간의 타락과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는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까지 어기면서 아담과 하와라고 하는 최초의 인간이 소위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열매를 먹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저들이 선악과를 먹게 된 결정적 동기(motive)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두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먹게 된 결정적 동기가 바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아담과 하와는 왜 절대로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은 행동을 가장 중요한 죄로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아져서 스스로 선악을 알려고 했던 마음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타락이며 죄로 여긴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는 이것을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이 선악을 아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모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아진 아담과 하와의 생각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음을 선악과를 먹은 다음의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묻자 아담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나무 열매를 주어서 자신이 먹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네게 어째서 이렇게 했느냐고 묻자 여자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뱀이 나를 꾀므로 자신이 먹었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자신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잘못은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심지어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하와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돌립니다.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사람이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선과 악을 나누는 창조주가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게 된 결과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이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서로 다른 자신들만의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되자 사람들 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갈등과 분열, 살인과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선과 악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됩니다. 그 결과 비록 다른 사람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더라도 자기에게 잘하는 것이나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나 이익이 되는 것은 선한 것으로 여깁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기에게 못하는 것이나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손해가 되는 것은 악한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모든 갈등의 시작은 이것만이 선한 것이다.” “이것만이 옳은 것이다.”라는 주장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선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생각의 뿌리에는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대하여 판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세상은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 했습니다.” 혹은 내가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선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세상을 갈등과 분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어놓은 인간의 한계를 무너뜨린 것이며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에덴동산의 한 가운데를 빼앗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에덴동산 한 가운데는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인 에덴동산 한 가운데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자리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들이 빼앗은 것입니다. 결코 인간이 서서는 안 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그 자리에 서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은 사람은 뱀이 말한 대로 아담은 하나님과 같아 졌습니다. 여기서 아담이 하나님과 같아졌다는 것은 아담이 정말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위치를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피조물인 사람이 피조물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창조주가 사는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정말 하나님과 같은 전능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만 바뀐 것입니다. 존재는 여전히 피조물인데 살아가는 방식은 창조자의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과를 먹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자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각과 판단대로 살아갑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자기 생각과 판단에는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아졌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자신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며, 자기 판단이 항상 옳다는 엄청난 확신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 같아도 속에서는 자기 생각과 판단이 따로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속으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이 옳다고 여깁니다. (목사의 설교)


물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 눈치 보고, 저 사람 눈치나 보면서 살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면에서, 또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독립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돕고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사람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자기에게 도움이나 이익이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따라야 하는 분이 아닌데,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따라야 하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지 창조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사람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창조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존재는 피조물인데 존재하는 방식은 전혀 피조물의 방식이 아닙니다. 마치 창조자인 것처럼 삽니다. 그러다보니 존재와 존재의 방식 사이에 모순과 부조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 모순과 부조화 때문에 모든 삶이 뒤틀어진 것이고, 모든 생명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기준으로 삼은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1:28-31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게,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창조주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의 모순과 부조화의 원죄를 넘어서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얼핏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쉬운 일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이것보다 더 어려운 삶의 방식은 없습니다. 사람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자기 객관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 즉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자기 이익과 욕심에 두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두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피조물인 사람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피조물의 방식으로 사셨습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잠을 자고, 피곤하면 휴식하고, 생계를 위해 목수 일을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몸으로 익히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의 오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연약한 인간으로, 피조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피조물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는 완전한 모범이셨습니다.


2:6-8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죽기까지 순종했지만,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으로, 피조물로 세상을 살아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살아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철저하게 피조물의 방식으로 사는 것, 이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피조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구원이며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종교 시스템이 아닙니다. 교리 시스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피조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시스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시험거리나, 사람을 빠뜨리려고 만드신 함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결코 하나님이 아님을 잊지 않게 하는 은총의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하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늘을 움직이려 하지 마십시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피조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진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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