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강해10-하나님의 형상과 타락1
하나님의 형상10 .mp3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

창세기 3:7-13

 

하나님의 형상 시리즈 열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쳐 주는 상징이라고 한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 또는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을 가르쳐 주는 상징입니다. 이처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비록 사람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고는 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에 대해선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으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선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심지어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덧붙이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열매에 특별한 효능을 가진 신비한 능력이 있거나 사람이 먹으면 당장 죽게 되는 독이 있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명령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금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선과 악을 사람이 함부로 나누고 결정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나누고 심판하는 것은 결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었습니다.


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엄중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창세기는 이것을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것이 도대체 왜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선악을 알도록 권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겼을까요?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 대신에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의 생각과 뜻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척도가 되고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선악을 판단하고 심판하려고 할 때, 모든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의 기준이 되실 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통치되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자, 선악을 상대화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5:20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이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열매를 먹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져서는 사람마다 자신의 이익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며, 하나님의 자리인 에덴동산 한 가운데를 사람이 차지한 것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 것을 사람이 짓게 되는 모든 죄의 근본 또는 원인이 된다고 해서 원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죄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인간 세상의 모순과 갈등 모든 부조화를 인간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창세기는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설명하는 인간의 타락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눈이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탐욕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기어코 먹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결과 인간에게 생겨난 유일한 변화는 눈이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열매를 먹었는데 겨우 눈이 밝아졌다는 창세기의 말씀이 얼핏 그리 대단하거나 엄청난 변화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눈이 밝아졌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인간의 타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3: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그렇다면 먼저 창세기가 말씀하는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무엇을 뜻 하는 것일까요? 이전까진 침침했던 눈이 잘 볼 수 있도록 시력이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한 마디로 눈이 뜨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눈이 뜨였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이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으로만 보지 남자나 여자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남자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고, 여자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성을 사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좋아하는 이성을 만나면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이럴 때 이성에 눈을 떴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모르거나 밝히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돈을 밝히기 시작하면 돈에 눈을 떴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도 이전에는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보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담과 하와는 어떤 눈을 뜨게 된 것일까요? 아담 자신의 눈을 뜬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아담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아담은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자의 위치로 올라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오로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러한 인간의 변화를 눈이 밝아졌다는 말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이 밝아진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눈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아담은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아닌 아담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다 다르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다르게 보인 것은 자신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고 나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지자 가장 먼저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이 보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부끄러움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저들이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3:9-10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자기들이 벗었다는 사실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가장 두려운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에는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살았음에도 아무런 부끄럼이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눈으로 보게 되자 모든 것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것도 보였고, 하나님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벌거벗은 것을 알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눈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악과는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는 긴장하거나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냥 벌거벗은 채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담이 있기 때문에 하와가 있었습니다. 둘은 둘이면서도 한 몸이었습니다. 아담의 유익과 하와의 유익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너의 유익이 곧 나의 유익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자연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자연의 모든 것은 따로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꽃과 나비를 생각해보십시다. 꽃과 나비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비는 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꽃은 나비가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하늘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하늘은 땅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꽃과 나비, 하늘과 땅은 결코 질투하지 않습니다.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습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여기셨던 창조의 원리이자 질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악이 뒤섞여 싸우는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선악을 초월하는 세상이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는 모두를 위해 함께 어울려 존재하는 그야말로 공존공생하는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어울림의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입니다. 가장 완전한 방식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존재의 방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이런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말씀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추고 숨길 것이 없는 정직하고 솔직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2: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갑자기 전혀 다른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상대방,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나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상대방,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나를 속이고 강탈하려는 상대방, 자신이 이기기 위해 나를 짓밟으려는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을 감추고 숨겨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와 나의 관계가 깨졌다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존재 방식이 깨졌다는 뜻입니다. 서로가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계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자신을 감추고 숨기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됐다는 뜻입니다. (예맨 난민 사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장벽이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는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한다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벌거벗은 사실을 깨닫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고 묻자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잘못이나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마저 깨지고 만 것입니다.


3:12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도전을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나무 열매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에덴동산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도 선악과를 먹기 이전과 똑같은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다는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던 아담과 하와가 이제는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는 눈이 달라지자 어떻게 됐습니까?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기들이 벌거벗은 게 보였습니다. 나와 경쟁해야 하는 상대방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두렵고 무서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눈으로 보느냐,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가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눈앞의 현실도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눈을 버리고 자신의 눈을 뜨는 엄청난 모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사는 것보다 더 영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결과는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선악을 넘어서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악 이전의 세계이고, 하나님 나라는 선악을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가진 선악의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내 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눈을 바꾸면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 세계관이 달라져야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결단이며 생각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보는 눈의 변화, 즉 세계관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아무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아무리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다고 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마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이용하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 사람의 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어떤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평생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과 하나님을 보고 살면 됩니다. 하지만 인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 만 있다면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놀랍고 신비한 체험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여정에 풍성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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