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타락2
창세기 3:1-13
하나님의 형상 시리즈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이라는 똑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시고는 사람을 에덴으로 이끌어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최초의 삶의 자리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설명을 드렸지만, ‘에덴’은 무엇을 상징하는 단어입니까? 히브리어로 에덴은 ‘기쁨’ 또는 ‘즐거움’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 살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사람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음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창2:8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신 에덴동산 한 가운데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였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는 두 나무는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아름답고 존귀하고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며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전능한 신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망각하고 마치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에덴동산에서 기쁘고 즐거운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며 사람을 하나님이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에덴동산 모든 나무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절대로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했습니다. 사람에게 지켜야 할 명령이 있다는 것은 사람은 신이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수단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아름답고 존귀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자신만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마음 한 가운데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내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자신만의 생명나무일 것입니다.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자신만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며 이것을 자기 마음 한 가운데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자꾸만 어긋나는 이유는 우리 마음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대신에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심, 하나님 없어도 괜찮다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에덴동산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롭게 살던 하와에게 뱀이 나타나더니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에게 묻는 뱀의 질문은 매우 교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오직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며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물었습니다. 뱀의 교묘한 질문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하신 오직 한 가지에만 초점을 두게 만들어 모든 것을 마음껏 먹게 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잊어버리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잘 아는 뱀의 간교함입니다. 사람은 아홉 번 잘 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한 번 못 한 것은 대단히 엄청난 일로 여깁니다. 뱀은 하나님을 모든 것을 금지하시는 분으로 교묘하게 왜곡시킨 것입니다.
창3: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뱀의 교묘한 말에 하와가 틈을 보이게 됩니다. 뱀의 질문에 하와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뱀이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것처럼, 하와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떤 것은 과장하고 어떤 것은 빼 버립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창2:16-17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런데 하와가 뱀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창3:2-3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하와는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생략해 버립니다. 단순히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또한 그것을 먹으며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반드시 라는 하나님의 강조를 생략합니다. 반대로 단순히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이나 ‘먹고 싶은 대로’라는 표현을 빼버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겼으며, ‘만지지도 말라’는 표현을 첨가하여 하나님의 금지 하신 일을 과장했으며, ‘반드시’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빼버려서 그 결과의 심각성을 축소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모두 잊어버리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과장하여 반발하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은 축소하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와의 대답에서 틈을 발견한 뱀은 이젠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기는커녕 오히려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뱀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신 것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인간다움을 지켜 주시기 위해 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은 하나님께서 마치 선악을 아는 지식을 혼자 독점하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중요한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게다가 뱀은 선악의 실체를 뒤집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죽음이라는 진실은 감추고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처럼 되는 지름길인 것처럼 속였습니다.
창3:4-5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뱀의 말과 하와의 말처럼 지금도 비슷한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목사들, 하나님의 말씀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실상은 다른 이야기들이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왜곡합니다. 이것은 단지 목사들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하나님 말씀에 목마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 하는 교인 역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했던 뱀의 말에 솔깃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미료를 듬뿍 뿌린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은 것에 매달려 신앙 생활합니다.
주의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등장하는 뱀을 많은 교인들이 사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뱀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하나라고 분명하게 소개하였습니다. 따라서 뱀을 사탄 혹은 마귀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탄 혹은 마귀를 만드셨다는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물론 뱀이 사탄에게 조정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창세기를 포함하여 구약성경은 이러한 사탄의 존재를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하와를 사탄이 조종했다는 표현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이 너무나 쉽게 모든 책임을 사탄이나 마귀에게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물론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은 뱀의 강요가 아니라 전적인 자신들의 선택이었습니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사탄이나 마귀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을 귀신을 내쫓는 소위 축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야고보서가 말씀하고 있는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은 귀신을 쫓는 축사가 아닙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야고보서 4장 7절의 앞뒤 말씀을 읽어보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며 세상에서 부를 얻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슬퍼하고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고 권면합니다. 다시 말해 야고보는 탐욕과 욕심에 맞서는 것이 곧 마귀와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고 하나님과 뱀의 말이 완전히 갈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뱀은 하와에게 그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뱀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비틀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틈을 보이자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똑같은 사건에 대해 하와는 전혀 다른 상반되는 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뱀의 말입니다.
하와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와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절대로 죽지 않는 다는 뱀의 말이 훨씬 더 솔깃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는 하나님보다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는 뱀의 말이 사람에게는 훨씬 더 은혜롭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을 죄와 타락에 빠뜨리기 위한 뱀의 꼼수였습니다. 사람을 유혹하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경고 말씀보다는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뱀의 말을 훨씬 더 은혜롭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말로 들은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뱀이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로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지금도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은혜로운 말, 귀가 번쩍 뜨이는 축복의 말이 넘쳐납니다. 교회마다 하나님보다 훨씬 은혜롭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말을 하는 목사들과 교인들로 넘쳐 납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 믿으면 병 고침을 얻고, 예수 믿으면 부귀영화를 얻고,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이야기를 한 주도 쉬지 않고 이야기 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빅딜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마치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중과 같은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타락했습니까? 뱀은 자기가 받은 지혜를 간교를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사람을 유혹하였고,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뱀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것, 자신이 받은 말씀을 자신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왜곡하는 것이 죄의 시작이며 인간의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뱀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의 죄와 타락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고 하나님께서는 숨은 아담을 찾으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3:8-9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원죄’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저 막연하고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죄는 결코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탐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피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유리한 것을 선으로 자신에 손해가 되거나 불리한 것은 악으로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아담과 하와 안에 있던 죄는 지금 우리 안에도 생하게 살아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죄로 말미암은 가장 근본적인 결과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파괴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와 뱀의 메시지.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뱀은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기막힌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두 가지 메시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만 들리는 건 아닙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만 뱀의 말도 들리는 곳입니다. 에덴동산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와 뱀의 소리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뒤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뱀의 소리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메시지는 모기 소리처럼 작고 미약하지만, 뱀의 소리는 천둥처럼 크고 강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메시지와 뱀의 메시지를 듣고 고민하다가 결국 뱀의 소리를 뒤쫓아 갔던 것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소리 중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뱀의 소리를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달콤하고 그럴듯하게 들리는 뱀의 소리를 쫓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뱀의 소리가 아닌 참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당장의 이익과 욕심에 흔들리는 자신의 탐심과 탐욕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탐심과 탐욕을 부추기는 뱀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가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