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다스려라
창세기 4:1-7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로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말씀을 12번에 걸쳐 설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창세기 말씀이 너무나 큰 도전이 되어 계속해서 창세기 말씀을 읽어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방금 읽은 창세기 4장 1절로 7절의 말씀을 가지고 “선으로 악을 다스려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창세기 3장의 마지막 부분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 준비하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미 설명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즉 인간을 위해 예비하셨던 에덴동산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이라는 히브리어는 기쁨 또는 즐거움을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는 말씀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이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결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창3:23-24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선악에 대한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거절한 것입니다. 대신이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하나님의 뜻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선과 악의 기준을 삼게 되었을 때 일어나게 되는 비극적인 일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가인은 ‘얻음’이라는 뜻으로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고 해서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엔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습니다. 성경은 아벨의 이름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가인의 아우’로 소개하였습니다. 비록 성경이 설명을 생략했지만 아벨이라는 히브리어는 헛된 또는 수증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에게 맏아들 가인은 하나님에게서 얻은 매우 특별한 아들이었던 반면, 동생 아벨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아들로 여긴 것입니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대조는 저들의 직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은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형 가인은 농사하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땅을 경작하는 가인의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신 일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서로 다른 직업을 통해서 동생 아벨을 양을 치느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존재라면, 가인이야말로 아버지 아담의 곁에서 아담의 뒤를 잇는 유일한 존재였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가인과 아벨은 자신의 일을 통해 얻은 결실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지은 농산물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을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형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거절당한 가인은 분노에 사로잡혀 안색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분노하며 안색을 변하는 가인을 꾸짖는 것까지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인과 아벨이 이야기를 읽고는 가장 먼저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가?”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4장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분명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설교자들이 이 의문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시도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벨은 가장 좋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지만, 가인은 농사지은 것 가운데 질이 떨어지는 것을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설교자는 가인의 제사에는 피 흘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초점을 두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후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히브리서의 해석이지 우리가 읽은 창세기 4장에는 가인보다 아벨이 더 큰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그 어떤 암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도대체 왜 가인의 제사는 거부되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졌느냐를 가르쳐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만약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창세기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는지를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저들이 드린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여지고 자신의 제사는 거절당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거절당한 가인이 하나님과 동생 아벨에게 어떻게 반응을 했느냐 하는 것에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성경이 기록하지도 않는 가인의 제물은 거절당하고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는지에 초점을 두고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가인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창세기의 진짜 메시지를 놓쳐 버리게 됩니다.
어쩌면 도무지 그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절당한 가인의 제사와 받아들여진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셨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이유를 생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왜 의도적으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들인 이유를 생략한 것일까요?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는 하나님의 이유를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 창세기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사람이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도무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나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태속에 있는 두 아이에 대해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그저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그 어디에도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도무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은 단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출발점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 같은 형편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 같은 형편에서 태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머리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누구는 그저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재용으로 태어났고 저는 이진우로 태어났습니다. 이재용과 저는 똑같은 68년생 동갑입니다. 세상에는 지나가기만 해도 남자들이 한 번씩 뒤돌아보게 만드는 예쁜 외모로 태어나는 여자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는 여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아도 암에 걸리지 않는 체질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도 온갖 병에 걸리는 체질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한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진 불공평에 대해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왜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는가?” “왜 나는 이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왜 나는 이렇게 일찍 몹쓸 병에 걸렸는가?”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불공평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사람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공평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벨의 입장에서는 형으로 태어난 가인이 부모님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불공평함이었다면 가인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거절당할 이유가 없는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한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불공평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인의 제사가 거절당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공평함에 대한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미 설명을 드렸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공평함에 대한 가인의 일차적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는 자신의 제사만 거절당한 것에 대한 가인의 반응에 대해 한글 성경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번역하였지만 영어성경은 몹시 분하여 얼굴을 떨어뜨렸다고 번역하여 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단순히 가인의 분노에만 초점을 두었지만 영어성경은 하나님의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라는 가인의 반응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좌절이라는 가인의 반응은 사람들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낄 때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일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이 드리는 제사는 거절하고 동생의 제사만 받아들인 하나님의 처사는 분명 불공평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분노하며 한편으로 좌절하였던 것입니다.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Gen.4:5 but on Cain and his offering he did not look with favor. So Cain was very angry, and his face was downcast.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얼핏 무척이나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황스럽습니다. 가인이 가진 분노와 좌절이 모두 무엇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신 하나님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째서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느냐? 며 가인을 책망하는 것처럼 물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가인을 책망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하여금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공평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는 네가 겪는 불공평함에 대해서만 생각하는데 동생 아벨 역시 둘째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함에 대해서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는 의미를 가진 질문인 것입니다.
창4:6 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Gen.4:6 Then the LORD said to Cain, "Why are you angry? Why is your face downcast?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신 사건은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내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께 물어보면 됩니다. 도대체 왜 제가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까? 겸손하게 물어보면 됩니다. 욥이 도무지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의 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묻고 또 물은 것처럼 가인 역시 하나님께 끊임없이 묻고 물어보면 동생 아벨이 겪어야 했던 불공평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동생을 죽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아주 격하게 감정을 표출했습니다. 온통 자기중심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가인은 모든 인정과 칭찬은 마땅히 자기에게만 돌아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은 불공평함만 보였지 지금까지 동생이 겪어야 했던 불공평함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겪어야 했던 불공평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겪은 불공평함 때문에 하나님에게 얼굴을 돌려 땅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장 7절이야말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고는 분노하며 좌절하는 가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비록 죄가 문에 엎드려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권면하십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서는 나를 넘어뜨리려 하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직면한 인생의 위기라고 한다면 그런 우리를 향해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인생의 책임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불공평함으로 인해 분노와 좌절에 사로잡힐 때마다 너는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빠지면 이전보다 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실수하거나 죄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위기의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아야 자신이 빠진 위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물론 죄를 다스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절대로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죄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매우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끼리를 더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다스린다고 매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분노, 미움, 시기, 질투, 좌절, 원한을 다스리려고 하면 오히려 이런 악한 감정을 다스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갈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나쁜 감정들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마음 선한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한 현실 때문에 분노와 좌절에 빠져서는 죄에 휘둘리는 인생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존귀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