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
창세기 4:1-8
지난주에는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하자 분노하며 안색을 바꾸는 가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죽인 사건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4장 1절부터 8절까지 말씀에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만한 마땅한 이유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일까요? 오늘은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될 때 일어나게 되는 비극적인 일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설교했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고 구별하는 것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이전에는 사람에게 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이후 사람에게 선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며, 악은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선과 악을 나누고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이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뱀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3: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시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만 인간이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죽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갈 때만 비로소 신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죽음을 의식하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에덴동산입니다.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에덴동산에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가정이 에덴동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녀가 하나님 되지 않으면 됩니다. 교회가 에덴동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사나 교인이 하나님 되려고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동산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어쩌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인간이 하나님이 주인이신 에덴동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온 아담과 하아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추수할 것이 생긴 가인은 자신이 지은 농산물로, 아벨을 자신이 기르던 양의 첫 새끼를 잡아 각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저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거절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성경의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제물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제사를 받아주시거나 거절하시는 분이 아시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제사는 단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제사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삶과 믿음을 드리는 것이며 제물은 그 사람의 삶과 믿음을 상징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창세기가 기록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그들이 바친 제물로 판단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드린 제물을 가지고 저들의 드린 제사를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름이 저들이 바친 제물보다 앞서서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창4:4-5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항상 한 묶음이기 때문에 삶이 뒤따르지 않는 제물만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물이 아무리 크고 대단하고 좋다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제사 드리는 사람의 삶이 선하고 옳아야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배 때 드리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구별하여 드리는 우리의 믿음 그리고 드려진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믿음을 받으시는 것이고 정작 헌금은 교회 재정부에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지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아닙니다. 제물은 내가 살아온 삶을 대신하여 드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도둑질한 돈, 사기 쳐서 얻는 돈, 도박으로 얻은 돈, 빚내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오직 정직한 땀으로 드린 헌금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삶,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예배입니다. 물론 삶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인생이란 사람의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삶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 삶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삶이며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삶입니다.
롬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과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쌓이고 쌓여서 한 사람의 삶과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가인의 삶도 그렇고 아벨의 삶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고 살아온 모든 것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삶이고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살아온 그 삶을 보십니다. 외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삶을 보십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느냐, 얼마나 큰 성공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살았느냐를 보십니다. 가인의 삶도 그런 관점에서 보셨고, 아벨의 삶도 그런 관점에서 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 한 번 잘 드렸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당장 인생이 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지만 형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한 번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다음 제사를 잘 드리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의 제사만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인은 분노하며 하나님을 향했던 얼굴을 돌려 땅으로 향했습니다. 가인은 왜 하나님께 분노하며 얼굴을 돌렸을까요?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이 틀렸고 자신은 올바른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는 분이라 여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시는 것이 옳은 일이고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여긴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거나, 자랑할 만한 일을 하고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일을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아담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가인의 마음을 읽은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네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가인에게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창4: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여기서 성경에 최초로 ‘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죄는 영혼의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사람을 지배하려는 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하타(hata)입니다. 하타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는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다.’ 또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길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마땅히 가야하는 길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사람이 가야할 길이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야할 길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가인의 죄가 그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가인을 지배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와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려는 결심을 하고는, 동생을 자신의 들로 데리고 나가 죽여 버립니다.
창4:8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거절되었다면 먼저 자신의 삶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를 생각하고 성찰해 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동생 아벨에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두었습니다. 동생 아벨만 없애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 아벨을 형제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쟁상대로 여긴 것입니다. 사람은 둘만 모여도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열을 나누고 위아래를 정하려고 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비교하며 경쟁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비교하며 경쟁하고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경쟁하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와 세상의 방식이 곧 비교와 경쟁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교와 경쟁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과 목사들조차 비교와 경쟁을 통해야만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비교와 경쟁의 관계로 만드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의 방식이지 결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을 붙여주신 것은 서로 누가 더 잘났는지 비교하며 경쟁하라고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붙여주신 것은 서로의 부족한 것을 도우며 살아가라고 붙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과 서로 도우며 살아가게 하신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을 붙여주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창2:20-21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도우며 살아야 관계로 만드셨다는 것은 단지 창세기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반복하여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형제에게 욕을 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형제의 인격을 비하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서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형제와 화목하지 않으며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말씀도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25:37-40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 특별히 교인이 교인을 사랑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런 교인들을 향해 분명하고 엄중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생구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별하여 자기는 하나님은, 예수님은 사랑하는 데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을 살인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인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요일4:20-21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일3:15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좋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져서는 모든 인간관계를 비교와 경쟁의 관계로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이웃도 형제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져서는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자기 생각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결코 이웃도 형제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누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만이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아니라 죽어가던 사람도 살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자유교회 공동체의 모든 분들이 사람을 죽이는 삶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