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15-가인에게 주신 표

가인에게 주신 표

창세기 4:9-16

 

오늘은 가인에게 주신 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반복하지만 지난 두 주간 살펴보았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 오늘 살펴볼 가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과 가인에게 일어난 사건은 모두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수차례 반복했지만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성경말씀에 담겨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을 오직 하나님께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고 구별하는 기준을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는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지극히 간단하게 보이는 사건을 통해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혼란과 갈등과 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때 일어나게 되는 비극적인 일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관계의 파괴입니다.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늘 하나님을 가까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하나님을 피해 숨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다음에 저들이 보여준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책임을 떠넘기는 미워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3: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3:12 그 남자는 핑게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음을 더욱 분명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과의 관계를 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그렇다고 저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가인이라는 아들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거절당한 가인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것은 가인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절을 통해 가인의 삶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거절하시는 것과 같은 순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삶의 이런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전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지만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난 너는 죄를 다스려라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여기서 제사는 우리의 믿음이나 신앙일 수도 있고, 우리의 살아온 삶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선을 행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고, 좌절할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살면서 겪는 내 인생의 불행이나 억울한 일은 우리를 더욱 악하게 만듭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죄가 원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결코 죄에 지배당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선을 행함으로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선이란 거창하고 대단한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시선을 하나님에게 향하고 얼굴을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신뢰하고 동의하는 것이 창세기가 가르쳐 주고 있는 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단순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은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실 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으시느냐 안 받으시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동생인 아벨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동생 아벨만 사라지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인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대응한 것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이는 가인의 모습에서 발견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최우선의 자리에 두려는 하나님과 같아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의 죄는 가인에게서 좀 더 뚜렷하고 난폭한 모습으로 그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은 자기 자신입니다. 참으로 가인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가인은 자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아벨을 존재해서는 안 될 악으로 여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 때문에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면,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거나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남을 비교하여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려고 합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함부로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른 바 갑질, 을질, 병질을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비굴해집니다. 심지어 나보다 낫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의 비극적인 모습이며 비참한 현실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결코 흠 없고 완벽한 천사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사람을 붙여주신 것은 서로 모여 누가 더 잘 낫는지 경쟁하고 시합하라고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라고 붙여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서 보이는 실수나 탐욕 또는 죄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도무지 아벨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해결하는 대신 아벨을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가인의 선택과 행동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가인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단순히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자신의 형제가 아니라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위협하는 경쟁자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므로 가인에게 아벨은 너의 지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벨은 너의 일부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네가 죽인 아벨은 너의 경쟁자가 아니라 네가 서로 돕고 살라고 붙여주신 형제라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에게는 아벨을 지키고 돌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러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형제에 대한 책임을 물었지만, 가인은 동생을 지켜야 하는 책임 같은 건 자기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아벨 스스로가 지켜야지 내가 아우까지 지킬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인의 대답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은 어디까지나 독립된 개인입니다. 가인도 아벨의 삶을 책임질 수 없고, 아벨도 가인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면에서 가인과 아벨은 각각 독립된 주체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형제이긴 하나 자기의 삶은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쪽 진실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독립된 개인이면서 동시에 지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은 결코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독립된 개인이지만 동시에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지체로 살아갑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서로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 어떤 생명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삽니다. 생명과 삶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얽힘이요 상호의존이요 흐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생명의 본질이고 세계의 본성입니다.


2004년 존 케리 상원의원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찬조연설 하나로 단숨에 미국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버락 오바마였습니다. 당시 그의 연설은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연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그는 이 연설을 통해 미국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렸고 결국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는 출발점이 되었던 연설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바마의 연설 한 마디 한 마디에 숨을 죽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형제애와 인류애의 불씨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흐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날 그가 했던 연설의 일부분입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내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내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내 삶마저 가난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이슬람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내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내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인 꿈을 추구하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을 살인하고 숨어있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의 질문에 나는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동생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동생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아주 오래된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내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오바마만의 대답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심지어 자신의 죄까지 감추려는 가인을 하나님께서 쫓아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신 땅에서 사람이 쫓겨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에덴에서 쫓겨났고, 이젠 그 아들 가인이 쫓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쫓겨나는 가인에게 를 주십니다.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시어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동안 가인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셔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도 비슷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심지어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일곱 갑절은 실제 일곱 배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4:14-15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마땅히 죽음으로 벌을 받아야 하는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시어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기준이 되는 선악과,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선악이 어떻게 다른 가를 보여주시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스스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았던 가인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아무런 정당한 명분이나 이유도 없이 함부로 죽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셔서 그 누구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나누는 선과 악은 사람을 죽이거나 제거하거나 것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선과 악은 사람을 용서하시며 또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가인과 다를 바 없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함께 도우며 살아가야 할 인생의 동역자로 여기기보다는 나와 맞지 않으면 제거해 버리거나 다시는 상종하지 않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가 자신들의 죄악을 덮는 최고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동성애이슬람입니다. 동성애자와 무슬림이 한국 사회나 교회에 실제로 악을 행하거나 해를 끼친 사례가 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모든 문제를 동성애이슬람에 대한 저주로 대신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너무나 가득한 온갖 불의와 고의적인 신앙의 왜곡은 조금도 고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야말로 가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이며 용서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저 사람이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구나!” 하고 가인을 보는 사람들마다 가인의 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의 죄와 그의 과거나 아무리 험악하다 할지라도 이제 새롭게 살기로 한다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표입니다. 비록 가인은 동생 아벨을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심판하여 동생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시므로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심판하지 죽이지 못하도록 경고하시는 표입니다. 가인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자신 역시 사람에게 죽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하는 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표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십자가라는 특별한 표를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상징하는 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나에게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는커녕 자그마한 이해조차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믿음이며 심지어 받은 하나님의 용서마저도 빼앗길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에게 잘못이나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역시 누군가의 잘못이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용서가 꼭 필요하다면, 내 삶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반드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오늘 말씀을 전하고 듣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반드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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