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16-에덴의 동쪽
창세기16-에덴의 동쪽.mp3

에덴의 동쪽

창세기 4:16-24

 

오늘은 창세기 416절부터 26절의 말씀을 가지고 에덴의 동쪽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땅의 저주를 내리십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가인에게 더 이상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며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쫓아내시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며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너무 크다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십니다.


4: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가인의 뻔뻔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셔서 누구도 가인을 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이며 용서의 표시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내릴 것이라는 언약을 주십니다. 여기서 일곱 배는 실제 일곱 배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4: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마땅히 죽음으로 벌을 받아야 하는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시고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하셨을까요? 여러분은 가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결정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좀 더 엄중하게 가인의 죄를 심판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니 가인 역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죽음에는 죽음으로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정의로우며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이지 진짜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인에게 더 엄중한 심판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아벨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아벨처럼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벨처럼 착한 자신이 가인처럼 나쁜 사람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당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아벨과 동일시하니까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시며 그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에 매우 심각한 도전을 던집니다. 창세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벨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벨을 죽인 가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의 후손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동일시해야 하는 사람은 억울하게 죽은 아벨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가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벨이 아닌 가인과 동일시한다면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마땅히 베풀어 주셔야 할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셨다고 여길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의 이야기는 선악에 대해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을 알게 하는 나무와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나무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과 악은 본래 하나입니다. 선이 따로 있고, 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한 나무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람 역시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선이 나오기도 하고 악이 나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아닌 그냥 사람입니다. 그럼 무엇이 저를 선한 사람이 되게 합니까? 제가 가진 선한 생각, 제가 품은 선한 마음, 제가 하는 선한 행동이 저를 선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저를 악한 사람이 되게 합니까? 제가 가진 악한 생각, 제가 품은 악한 마음, 제가 하는 악한 행동이 저를 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저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받았던 아브라함 역시 많은 선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많은 실수와 죄를 범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하도록 도왔지만 그 역시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으며 여러 실수와 죄를 범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영웅이라는 다윗은 더욱 심각합니다. 비록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위대한 일을 많이 했지만 그가 저지른 죄악 역시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저지른 실수나 배신은 너무나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행한 선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그로 인해 죽었던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면 악한 사람이지만 그로 인해 전해진 복음을 생각한다면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며, 이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결코 선과 악을 무 자르듯이 분명하게 나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항상 한 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선악을 제대로 분별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함부로 사람을 무 자르듯이 너는 선한 사람, 너는 악한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사람이 함부로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나누는 판단이나 심판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는 하나님께 쫓겨난 가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창세기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주한 곳이 에덴의 동쪽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개별적인 다른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난 것과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한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기 때문에 에덴의 동쪽에 거주한 것이고, 에덴의 동쪽이라는 표현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는 걸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은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덴의 동쪽은 메타포입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삶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더니”(4:16). 창세기의 기록에 주목해야 합니다.


에덴의 동쪽은 하나님이 부재하는 곳, 즉 에덴이 아닌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에덴을 갈망하는 곳입니다. 에덴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에덴을 갈망하는 자리, 그곳이 바로 가인이 살아야 하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낙원을 잃어버린 삶은 단지 가인뿐만이 아닙니다. 에덴의 동쪽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 에덴 동쪽에서 살고 있습니다. 끝없이 에덴을 갈망하고 꿈꾸면서면서도 에덴이 아닌 곳에서 버둥대고 있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 에덴이 있을까 생각하며 여기저기를 방황하며 세상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에덴을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에덴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에덴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에덴을 끝없이 갈망하면서도 끝내 에덴을 찾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삶을 에덴의 동쪽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정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라고 해도, 어린 아이가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태초의 동산, 참된 행복을 누렸던 낙원,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했던 에덴동산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이라고 해서 예외일리 없습니다. 비록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놋으로 갔지만 그렇다고 에덴을 갈망하는 마음, 에덴에서 누렸던 참된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마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에덴을 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을 방황하는 가인이 에덴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창세기는 에덴의 동쪽으로 간 가인이 거기서 가장 먼저 한 일을 417절에 단 한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고 아들의 이름을 딴 에녹이라는 성을 쌓은 것입니다. 가인이 아들을 낳고 가장 먼저 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주신다는 특별한 표와 언약을 받았음에도 그는 하나님의 표와 언약을 신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성을 쌓은 것입니다.


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그런데 창세기는 가인이 아들을 낳고는 아들을 에녹이라고 하고, 성을 쌓고는 자기가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가인이 자신이 낳은 아들과 자신이 지은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한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에녹시작’, ‘개벽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1절이 말하는 태초와 대립되는 시작인데, 가인이 자신이 만든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이름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왜 자신이 만든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났기에 하나님 없는 에덴을 만들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성을 쌓은 것입니다. 성을 쌓아 자기 생명과 삶을 스스로 지킬 수 있으면 그곳이 곧 에덴이 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가인의 족보는 인류 문명의 시초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가인의 후손은 라멕에게로 이어졌으며 라멕에 대해 창세기는 그가 아내가 둘이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후손 라멕이 최초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일부다처제를 시작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성을 쌓아 에덴을 만들려고 했다면, 가인의 후손 라멕은 더 많은 아내와 더 많은 자식을 통해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멕 이후 오랜 역사 동안 인류는 일부다처제로 가정을 이루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일부다체제를 인정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인류의 역사는 이것이 아주 어리석은 시도였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가인의 후손 라멕은 아다라는 아내에게서 두 아들 야발과 유발을 얻었습니다. 형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즉 농경문화의 조상이 되었고, 동생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치는 자의 조상 즉 예술문화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씰라에게서 얻은 아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로 소위 철기 문명의 주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는 라멕의 자식들을 통해 라멕의 시대에 오면서 인류 문명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에덴을 만들기 위해서 성을 쌓고 도시를 세운 이후, 마침내 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거대하고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4:20-22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의 시대에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 없이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가인의 시도는 그의 후손 라멕의 시대에 마침내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하고 엄청난 문명을 이룬 라멕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기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라멕이 자신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하는 말에서 너무나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죽였고 자신의 상함으로 인해 소년을 죽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라멕은 가인을 해친 벌이 칠배라며 자신을 해치는 벌은 칠십칠 배라고 선포합니다. 칠배의 벌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보호의 언약이라면 칠십칠 배의 벌은 라멕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강력한 보복의 선포입니다. 칠십칠 배의 벌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야말로 가인의 후손 라멕은 그 누구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막강함 부와 권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그렇다면, 가인이 만들기 원하였고 마침내 그의 후손 라멕이 만든 엄청난 부와 권세를 가진 세상을 과연 에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가진 엄청난 부와 권세를 이용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소년을 함부로 죽이는 라멕의 삶을 과연 에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가진 엄청난 부와 권세를 이용해 제멋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사는 것이 과연 에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라멕은 당시로서는 최고로 발달된 문명을 살았습니다. 누구라도 자기 맘에 안 들면 죽일 수 있는 절대 권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라멕이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권위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라멕의 인격과 삶은 온통 야만과 폭력, 오만과 잔인함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가인보다도 죄악이 더 깊어졌고, 폭력은 더 잔인해졌고, 자기주장도 더 강해졌고, 자기만 아는 교만과 이기심도 더욱 커졌습니다. 문명과 문화는 발달했지만 인간의 삶은 오히려 퇴보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완전히 썩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인간의 문명의 실체입니다. 창세기 4장이 기록하고 있는 가인의 후손들이 만든 문명은 에덴의 동쪽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에덴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에덴을 대체하려고 했던 가인과 그 후손들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족보를 통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실패한 에덴 만들기 시도는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는 인간의 노력이기도 합니다. 가인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지금도 에덴의 동쪽에서 에덴을 갈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처럼 문명과 문화를 통해서 에덴을 대체하려 하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이 더 발달하면 에덴과 같은 행복한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꿈꾸며 문명의 발달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가르쳐 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가인의 길을 계속 가고 있습니다. 돈이 더 많아지면, 권세가 더 높아지면, 과학 기술이 더 발달하면, 의술이 더 발달하면, 에덴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가인이 갔던 그 길을 여전히 가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문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러한 것처럼 사람이 만들어 낸 문명과 문화 역시 선보다는 악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인과 그 후손의 이야기가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문명이나 문화를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해서도 안 되지만, 문명이나 문화가 에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희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문명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문명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천 년 후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명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 문명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과 사람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떠난 에덴의 동쪽에서는 아무리 성을 쌓고 문명과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킨다고 해도 참된 에덴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에덴을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람 스스로 에덴을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을 살기 원한다면 깨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고 했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이용하며 살려고 했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코람데오)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소 인생은 에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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