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17-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창세기17-메멘토모리.mp3

메멘토 모리

창세기 4:25-5:32

 

오늘은 창세기 425절부터 532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메멘토 모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에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후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이라는 땅에서 하나님 없는 삶을 시작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 없이 에덴을 만들기 위해서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고 문명과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가인과 그 후손들에 대한 내러티브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문명과 예술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없이 에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에덴을 이루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문명이나 예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새로운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들 셋은 죽은 아벨처럼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새로 낳은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는 달리 매우 신실했음을 셋이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했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는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내어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다면, 셋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5장 전체는 아담이 새로 얻은 아들 셋의 후손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족보와 창세기 5장의 셋의 족보는 얼핏 비슷하지만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족보는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라멕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하였지만, 창세기 5장의 셋의 족보는 셋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첫 사람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셋의 후손들에 대해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 창조의 정통성이 가인의 후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의 후손들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족보라고 한다면 셋의 족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져 내려가는 족보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4:16-1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의 후손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핏 지루하게 반복되는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친 창세기 5장의 족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메타포를 가진 매우 중요한 내러티브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교인들의 관심은 셋의 족보에 담겨진 메타포를 찾기 보다는 족보가 기록하고 있는 아담과 그 후손들의 나이에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창세기 5장이 기록하고 있는 아담과 셋의 후손들이 살았던 나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힘든 햇수를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 셋은 912, 에노스는 905, 게난은 910, 마할랄렐은 895, 야렛은 962, 므두셀라는 969, 라멕은 777세를 살고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살았다는 어머 어마한 햇수 때문에 창세기 5장을 읽는 교인들의 관심은 주로 도대체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에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오래살고 싶은 인간의 욕심에 의한 관심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목사나 과학자들은 저들의 산 햇수에 대해 다양하고 과학적인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매우 위험한 성경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지구의 탄생과 인류의 시초를 가르쳐주기 위해 기록된 역사책이나 과학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기록한 신학 책입니다. 신학 책을 역사책이나 과학책처럼 읽고 해석하는 것은 마치 문학책을 수학책이나 과학책처럼 읽고 해석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살았던 어마어마한 나이는 단순히 창세기에만 나오는 기록이 아닙니다. 여러 나라의 고대 기록에도 자신들의 조상에 대해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조상이 살았던 나이를 수천 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을 보면 단군의 나이를 무려 1908세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대 중동의 수메르 신화를 보면 자신들의 조상이 살았던 나이를 1만년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살았던 어마어마한 나이는 실제 살았던 나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의도적인 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왜 의도적으로 아담과 그 후손들의 나이를 과장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과 셋의 후손에 대한 족보는 저들이 아주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결국은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1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과 그 후손에 대해 비록 저들이 아주 오랫동안 살았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죽었더라고 기록한 것은 창세기 217절에 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5장의 아담과 그 후손들의 족보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비록 저들이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담겨진 첫 번째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5:5 그는(아담)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5:8 그는() 912세를 살고 죽었더라

5:11 그는(에노스) 905세를 살고 죽었더라

5:14 그는(게난) 910세를 살고 죽었더라

5:17 그는(마할랄렐) 895세를 살고 죽었더라

5:20 그는(야렛) 962세를 살고 죽었더라

5:27 그는(므두셀라) 969세를 살고 죽었더라

5:31 그는(라멕) 777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들의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인간의 죄에 대한 결과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사람에 따라 오래 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죽는 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 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져서는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시도와 노력에도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죽는 걸까요?” 나이 들어 늙기 때문에 죽는 걸까요? 아니면 병이 들기 때문에 죽는 걸까요? 물론 사람은 늙어서 죽기도 하고, 병이 들어 죽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그 사람이 사람입니까? 모든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도구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의 삶이 유한한다는 사실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인생을 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의 장치였던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에게 죽음은 우리의 인간됨을 보호하고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장치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세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은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교만하고 탐욕스럽게 삽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죽임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살거나 무시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이 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은 마음에 두고 살아갈 때(메멘토 모리) 비로소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형벌이면서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과 셋의 후손에 대한 족보를 죽음의 족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족보에 매우 특별한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에 대한 족보입니까? 바로 에녹에 대한 족보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후손 모두가 죽었다는 것으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유독 에녹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기록이 없습니다. 창세기는 에녹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에녹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죽음의 족보 가운데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이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렇다면 에녹은 어떻게 해서 다른 선조나 후손들처럼 죽지 않고 하나님께 들려 올라가는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창세기 5장은 에녹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녹이 다른 선조나 후손들처럼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행이란 함께 걷다 또는 삶의 방식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따라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이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다른 선조나 후손처럼 죽음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에녹이 언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다음부터 삼백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에녹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는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다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65세 이전까지는 개차반으로 살다가 65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고는 그 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낳기 이전에도 신실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고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한 데에는 므두셀라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21-23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므두셀라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187세에 라멕을 낳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살다고 969세에 죽었습니다. 므두셀라가 낳은 아들 라멕은 182세에 노아라는 아들을 낳고 595년을 살다가 777세에 죽었습니다.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었던 그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였습니다. 그럼 노아가 몇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까? 노아가 600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369세였으니까 홍수 심판이 일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969살이었습니다. 므두셀라는 홍수 심판이 일어난 그 해에 96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7:11-12 노아가 600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므두셀라와 그의 나이 969세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일종의 메타포였던 것입니다. 앞서도 설명을 드렸지만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므두셀라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해 오래 참으심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는 그 때부터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창세기가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인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과 자신이 낳은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에녹이 살았던 365년은 1365일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녹이 365년을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우리 역시 1365일 매일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끝은 죽음입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 누가 몇 살에 아들을 낳고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는 창세기 5장에서 반복되는 아담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살다가 결국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방식으로 인생을 마칩니다. 하지만 아담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로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에녹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라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자기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 에녹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녹이 자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므두셀라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아들을 낳은 다음부터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데려가셔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고 표현한 것은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사라지는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이동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교인들의 죽음에 대해 누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은 마치 번데기가 고치를 벗어 던지고 나비로 변화되는 것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고후5:9 우리는 이 육체를 가지고 여기서 살든지 육체를 떠나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살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모두가 죽었다는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에녹이 자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므두셀라를 낳으면서부터입니다. 므두셀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을 상징하는 메타포였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자기 방식대로 살다 죽은 인생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다 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인생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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