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피림의 방식
창세기 6:1-10
오늘은 창세기 6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네피림의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지난 두 주에 걸쳐 설교를 했던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족보 이야기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셋의 족보 이야기에 담긴 메타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의 족보 이야기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벨을 대신하여 얻은 셋의 족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가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를 연달아 기록한 데에는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의 비교를 통해 전혀 다른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에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첫 번째는 에녹입니다. 가인은 아들을 낳고는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하고 에덴의 동쪽에서 자신이 만든 도시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왜 아들과 자신이 만든 도시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했습니까? 에녹이라는 이름에는 시작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없이 에덴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겠다는 뜻으로 자기 아들의 이름과 자신이 만든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한 것입니다.
셋의 족보에도 에녹이 나옵니다. 셋의 5대째 후손의 이름이 에녹이었습니다. 그럼 셋의 족보에 등장하는 에녹은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셋의 족보는 인간이 장수했다는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죽음의 족보였습니다. 그런데 셋의 5대 후손 에녹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죽음 말고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해 세상을 떠났지만 에녹만 유일하게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가인과 셋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름이 같았던 에녹은 각각 다른 의미로 인간의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인 족보에 등장하는 에녹이 하나님 없는 시작을 의미한다면, 셋 족보에 등장하는 에녹은 죽음이 아닌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에는 에녹 말고 또 다른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라멕입니다. 가인의 족보에 등장하는 라멕은 두 아내를 통해 얻은 자식들을 통해 유목과 농경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문화예술이 꽃을 피우고, 철기 문명도 이루어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없는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가인의 뜻을 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의 자식들을 통해 대단한 인간문명과 문화를 이루어 낸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에덴을 만들기 위한 가인과 그 후손들의 노력이 마침내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창4:20-22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정말 라멕의 시대에 만들어 인간의 문명이 하나님 없이도 에덴을 만들어 낸 것일까요? 라멕의 시대에 이루어 낸 인간 문명이 어떠했습니까? 라멕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일부일처라는 창조 원리를 깨뜨리고 두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비록 어린 소년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하는 사람에게는 벌이 77배라며 사람들을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복수하고 학살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가인과 그 후손들이 만들어 낸 문명은 결코 에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문명은 더 큰 힘과 더 높은 권세와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야만의 시대를 만든 것입니다.
창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 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의 족보에서 라멕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세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족보에 등장하는 라멕이라는 이름이 셋의 족보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셋의 족보에 등장하는 라멕은 노아의 아버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셋의 족보에 등장하는 라멕은 가인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라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라멕은 방주를 만든 노아의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셋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가문의 후손들이 먼 후대에 이르러 서로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라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라멕이라는 이름을 이용해 가인의 족보 이야기와 셋의 족보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6장입니다.
창세기 6장은 사람의 죄악이 도무지 하나님께서 참고 견디시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인의 후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셋의 후손들 역시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창세기 6장 5절과 6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죄악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할 정도로 사람의 타락과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세상에 가득 찬 사람들의 죄악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셋의 후손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는 하지만 저들 역시 심각한 타락과 죄악에 빠졌습니다.
창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세기 6장은 가인의 후손 라멕과 셋의 후손 라멕이라는 같은 이름을 이용하여 저들이 죄악이 어떻게 연결이 되고 있는 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합니다. 가인의 후손이었던 라멕의 시대에 가인의 후손들만 타락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셋의 후손이었던 라멕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셋의 후손들 역시 타락하고 죄악으로 가득 찼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셋의 후손들이 왜 하나님 없이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가인의 후손들과 다르게 살지 않고 결국에는 똑같이 타락하여 죄악으로 가득 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에 대해 설명해 주는 말씀이 창세기 6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6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1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딸들을 보고는 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는 저들을 아내로 삼기 시작합니다. 일부 목사들 중에는 2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앞뒤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이것은 적절한 해석은 아닙니다.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6장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셋의 후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창6: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족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이 둘째 아내 씰라에게서 두 명의 자식을 낳습니다. 한 명은 철기 문명의 조상이 되었던 두발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누이동생이었던 나아마였습니다. 족보에서 여자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아주 오래된 관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나아마라는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나아마는 성경의 족보에 최초로 기록된 여인의 이름이었습니다. 물론 창세기에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족보에 기록된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그녀를 이름을 기록한 이유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나아마라는 이름은 “달콤하다,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라멕의 딸 나아마라는 이름을 통해 가인의 후손에서 태어난 딸들이 아름다웠음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눈에 보이는 여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앞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을 의미한다면,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셋의 후손 남자들이 하나님을 떠났던 가인의 후손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은 더군다나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던 셋의 후손들이 사람들의 눈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문명과 문화를 이룬 가인의 방식에 마음을 빼앗겼음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신실한 삶보다는 하나님은 없는 화려하고 쾌락적이고 아름다운 인간의 문명과 문화에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던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화려하고 쾌락적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문명과 문화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 사람은 그저 육신만 지닌 존재로 전락했다고 설명합니다.
창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결과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태어난 자식들은 하나같이 모두 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용사들을 네피림이라고 했습니다. 네피림은 용사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들은 모두 용사가 되어 당대에 이름을 날리는 명성을 지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용사가 되어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이 된다는 것이 얼핏 듣기에는 꽤 괜찮아 보입니다. 이것을 고지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각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지론은 교인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주장입니다.
창6: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연합하여 낳은 네피림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세상의 용사가 되고 영웅이 되어 이름을 날리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용사나 영웅과는 매우 미묘한 차이가 있는 단어입니다. 용사로 번역된, 영로로는 히어로로 번역된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이기 보다는 약한 자를 괴롭히는 힘 센 거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셋의 후손 아들들이 하나님을 떠났던 가인의 후손 딸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진 힘과 권세를 이용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폭력을 휘두르는 네피림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과 권세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오늘의 어벤져스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용사나 영웅이 나타나 자신들을 다스리며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용사나 영웅이 나타나 그들의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피림과 같은 용사나 영웅들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의지하고 숭배하는 영웅이나 용사는 사람을 돕는 용사가 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힘이나 권세로 사람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우상이 됩니다. 실제로 네피림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과 권세와 명성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여기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 제멋대로 빼앗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네피림의 방식을 다른 말로 하면 강한 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6: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 뿐 임을 보시고서,
네피림의 방식은 세상을 이전보다 더욱 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심지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조차 악으로 가득 찬 것을 보시고는 세상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며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들이 어울려 만들어 낸 세상의 죄악, 사람들의 죄악을 보시고는 더 이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에는 그 어떤 소망도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그래도 고쳐 쓸 수 있겠구나”가 아니었습니다. 힘센 사람들이 약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세상의 질서, 네피림의 질서를 완전히 깨뜨리지 않고는 더 이상 새로운 출발은 불가능하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창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과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시기로 작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과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사람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생물체와 공중을 나는 새들까지 포함해서 세상 전체를 거대한 심판의 대상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주신 모든 동물들까지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피림이라고 하는 용사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다른 이들을 함부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저들이 힘이 세고 거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가진 소나 양과 같은 많은 가축들을 가지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많은 말들을 타고 남들보다 빨리 움직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축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힘 있는 네피림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창6: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고대의 권세는 누가 많은 소와 양을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강하고 튼튼한 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가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소와 양, 말을 가지기 위해서는 약한 이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했고, 자신이 가진 많은 소와 양, 말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형태나 방법은 달라졌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네피림이라는 용사의 권력은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다른 이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과 재산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세상의 모습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을 힘 있는 몇 사람이 독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악한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멕의 방식, 네피림의 방식을 깨뜨리지 않고는 더 이상 인간의 미래는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내리신 결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땅에서 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결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파괴나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 심판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노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심판하시려는 계획 중에도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노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은 그가 남들과는 다른 대단한 용사나 영웅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를 이루기 위해 노아를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을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 역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사는 세상이기 보다는 여전히 네피림의 방식을 따라 사는 세상입니다. 네피림의 방식을 따라 살던 라멕의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전히 네피림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세상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존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세상은 그 사람이 가진 돈으로, 그 사람이 가진 권력으로, 그 사람이 가진 외모로, 그 사람이 가진 학력으로, 그 사람의 출신 배경으로, 그 사람의 출신 민족과 인종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대하는 세상의 방식이며 네피림의 방식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에녹이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은 것도,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구원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서도 구원의 은혜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 방식이나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내 소원과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 원망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루며 살고 있는지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소원과 내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훨씬 더 나에게도 더 좋은 세상이라는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의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