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대로 하였다
창세기 6:9-22
오늘은 창세기 6장 9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꼭 그대로 하였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는 꼭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창세기 1장은 무려 6번에 걸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6번에 걸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더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6일에 걸친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그야말로 완벽하였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창1:10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2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8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1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5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무려 6번에 걸쳐 “보시기에 좋아더라”고 말씀하셨던 세상에 대해 창세기 6장은 반복하여 세상의 악함과 부패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세상 악함과 부패함에 대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반복하여 기록한 하나님 창조의 완전함과 대조를 이루기 위한 의도적이며 상징적인 문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완전했던 만큼 세상의 죄악과 타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조차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대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6:11-13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창조하신 세상은 오래 되지 않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심히 근심하실 만큼 심각하게 부패하고 타락하고 포악해졌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창조하신 세상이 사람과 땅을 모두 심판해야 할 만큼 타락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6장까지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인간 세상의 타락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가인의 후예 라멕 시대의 타락일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 시대는 농경문화와 철기 문명 그리고 예술과 쾌락을 극도로 발전시켰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라멕의 시대는 지극히 포악하고 폭력적인 세상이었습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결코 용서를 베풀지 않았으며 반드시 생명을 빼앗아 복수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는 77배의 보복을 가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창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그런데 창세기는 가인의 후손 라멕의 시대에 대해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신 시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는 가인의 후손 라멕의 시대에 대해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 없이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가인의 후손들이 만들어 내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여긴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을 떠나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가인의 후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여긴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고 하는 셋의 후손들의 타락이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렸던 이들이 가인의 후손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는 가인의 후손들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셋의 후손 남자들이 하나님을 떠났던 가인 후손의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던 셋의 후손들이 사람들의 눈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문명과 문화를 이룬 가인의 방식에 마음을 빼앗겼음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신실한 삶보다는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 없이 이룩한 화려하고 쾌락적인 인간의 문명과 문화에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셋의 후손 남자들이 하나님 없이 살았던 가인 후손 여자들과 결혼하여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들이 새롭게 만들어 낸 인종이 무엇입니까? 네피림입니다. 네피림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연합한 것입니다.
창6:4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네피림이란 하나님의 방식과 세상의 방식을 혼합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네피림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은 이들이 세상의 권력자가 되어 세상에 그 이름을 드높였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없이 이룬 세상의 문명과 문화에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힘까지 이용해 그야말로 온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세상의 딸들이 합쳐서 만들어낸 네피림을 사람들은 용사라 영웅이라 칭송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이끌어 가는 세상을 그 어떤 세상보다 더 악하게 여기셨습니다. 저들이 만들어 낸 세상은 도무지 그 어떤 개선의 가능성도 없음을 아시고는 저들을 완전히 멸하여 버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창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하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여기신 인간의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 없이 에덴을 만들고자 했던 가인의 후손 라멕 시대의 타락과 부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이 살고자 했던 이들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포악해지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저들의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는 끝까지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 없이 살려고 했던 가인의 후손들과 연합하여 세상의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타락시키고 부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참으시거나 인내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가인의 후손 라멕 시대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서는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셋의 후손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것에 대해서는 참으시고 인내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는 더 이상 세상을 바꾸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소망도 없기 때문이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매우 중요한 영적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교인들이나 목사들 중에는 교회나 목사들에 대한 세상의 엄격한 잣대와 기준 그리고 비판에 불평을 가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이나 목사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죄 많은 똑같은 사람인데 교인들이나 목사들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와 기준으로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실수나 죄를 저질렀어도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보다는 교인들이나 특히 목사가 죄를 지었을 때 세상은 더욱 신랄하고 가혹한 비판을 합니다. 물론 교회 역시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떤 단체나 공동체와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도 되지 못하고 세상의 빛도 되지 못하는 교회를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면서 세상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유지되는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세상을 더욱 타락하고 부패한 곳으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연합하여 만들어 내는 세상의 부패와 포악함에 대해 더 이상 참으시고 인내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쓸어버리신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사람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의 모든 질서를 완전히 깨뜨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극심한 타락과 부패와 포악함은 단순히 몇몇 사람들의 죄로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른바 하나님의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이 연합하여 만들어낸 네피림의 질서야 말로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린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질서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다스리는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 네피림의 모든 질서를 완전히 깨뜨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창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하지만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네피림의 방식이나 세상의 방식에 물들지 않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불의한 시대에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노아가 불의한 시대에 마지막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만든 방주를 통해 사람과 땅을 모두 멸하신다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땅의 생명과 공중의 새들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어 노아가 만든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만든 방주를 대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피난처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노아가 만든 방주는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내리신 대홍수로부터 노아의 가족들과 땅의 짐승들과 공중에 나는 새들의 생명을 지키는 피난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는 대피소나 피난처가 아니었습니다. 대홍수 이후 새롭게 시작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훈련의 장소가 바로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명령하신 방주는 세상이 끝날 때에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는 세상을 위해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땅의 생명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훈련시키는 곳이라고 이해할 때에만 방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분명 세상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의 피난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이 위로받고 치유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더 이상 상처의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으로 나가지 말고 평생 교회에서만 머물러 살라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합니까? 아니오. 교회가 세상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이유는 또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과 싸워 세상을 바꾸라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방주에 한 번 들어가서는 다시는 나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만 살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새롭게 시작될 세상을 준비하고 훈련하기 위해 방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르치는 종말의 믿음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종말론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멸망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을 기독교의 종말론이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이 아니라 염세주의자들이나 사이비 신앙의 종말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심판과 종말은 결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는 심판이나 종말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심판과 종말은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신앙의 심판과 종말에 대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땅을 멸하겠다는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경고는 현재 세계의 종말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미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이라고 하면 더 이상의 내일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종말을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더 큰 악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종말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여기는 사람들 중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고 채우지 못한 욕망이나 쾌락을 채우려고 하거나 이루지 못한 복수를 위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죽음을 인생의 종말이라고 여기고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런 내일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의 종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은 약육강식의 불의한 세상이 끝나고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홍수의 재앙에서 남겨두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겠다는 메타포 또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명과 문화를 이용하고 하나님까지 이용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세상은 그야말로 그 어떤 질서도 없는 무법천지의 세계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속속들이 타락하고 부패한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부정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사람만이 가장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노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세상은 그대로 두기만 해도 지옥과 같은 곳이 될 것이며 머지않아 스스로 멸망하는 길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세상의 파괴와 사람의 멸망이라고 한다면 굳이 대홍수를 일으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그대로 두기만하면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세상은 스스로 파괴되고 사람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사람과 땅을 멸하시는 대홍수를 경고하시고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가만히 두기만 하면 저절로 멸망할 세상에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과 땅을 멸하시는 대홍수를 경고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홍수라는 하나님 심판의 경고는 인간과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홍수는 스스로 파괴와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대홍수로 악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노아마저 악한 세상의 질서에 휘말릴지도 모를 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땅을 멸하겠다고 하신 말씀은 얼핏 인류 전체가 멸종당할 지경에 처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노아와 같이 이제 곧 타락하고 부패한 현실에서 곧 멸종이 될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홍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함께 땅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과 함께 땅과 함께 멸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용사나 영웅으로 칭송받던 네피림이 지배하던 시대를 사람 모두가 속속들이 썩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당대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강도라고 꾸짖었습니다. 노아의 시대가 타락한 네피림의 시대였다면, 예수님의 시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권력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해 막강한 권세와 부를 누렸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권세와 부의 도구로 전락한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리므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막13: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새롭게 태어날 새 시대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를 위한 방주와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저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을 위로하고 안식하게 하고 치유하는 피난처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새로운 삶의 가치와 방식을 가르치고 훈련하여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는 방주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교회는 노아의 방주처럼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는 방주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이야기가 여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당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한 방주의 크기는 지금의 치수로 길이가 135m에 높이가 14m, 너비가 23m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배였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이정도 크기의 배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도무지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배였습니다.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꼭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영적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창6:22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떻게 해야 교회가 노아의 방주처럼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상을 여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나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교회 혼자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어 간다고 세상의 교회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다른 교회들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무런 변화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나 혼자, 우리교회 혼자만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교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장차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해 노아처럼 거룩한 씨앗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꿀 씨앗마저 없다면 더 이상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