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축복과 저주
창세기 9:18-27
창세기 2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9장 18-27절의 말씀을 가지고 “노아의 축복과 저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홍수 심판과 무지개 언약 이후 마침내 방주에 나온 노아와 그 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창세기 9장 18절로 19절의 말씀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창세기 10장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족속과 민족과 나라들이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9: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10: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창세기 9장 18절로 19절의 말씀이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을 소개한 것은 이들을 통해 장차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나라들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소개하면 유독 둘째 아들 함에 대해서는 그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심지어 창세기 9장은 반복하여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잘못된 일에 대해 그 저주는 가나안이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창세기는 왜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누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지 않으면서 유독 노아의 둘째 아들 함에 대해서는 그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고 함이 지은 잘못에 대해 함이 아니라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9장 18절부터 29절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창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맨 처음으로 한 일은 농사를 짓는 것이었으며 그가 농사지었던 것은 포도나무였습니다. 지중해 연안 지대는 그 어떤 지역보다도 포도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과 토양이었습니다. 지금도 지중해 연안 지역은 포도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과 토양이어서 수많은 농부들이 포도나무를 기르고 포도나무에서 얻은 포도로 엄청난 포도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지중해 근방의 문화에서 포도주는 식탁에 반드시 오르는 기본 음료라는 점에서 노아가 포도나무 농사를 지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는 창세기의 기록은 포도나무 재배와 포도주가 아주 오래된 삶의 방식이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노아는 자신이 농사지은 포도나무에서 얻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마시고는 술에 취해서는 자신의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이 든 노아의 행동을 마치 노아가 심각한 죄를 짓고 타락에 빠진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그 어디에서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이 든 노아의 행동에 대해 타락이나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고 잠이 든 노아의 행동을 죄나 타락으로 여긴다면 아버지의 죄를 형제들에게 드러내었던 함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죄를 감추어준 셈과 야벳의 행동이 함의 행동보다 더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잠이 든 노아의 행동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포도주에 취해 자신의 장막에서 벌거벗고 잠이 든 것을 마치 노아가 심각한 타락에 빠졌거나 죄를 지은 것으로 여기는 것 역시 지나친 주장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든 사건은 죄나 타락이라기보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작은 실수나 허물에 지나지 않는 사건입니다.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이 든 노아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았다면 별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고의나 의도하지도 않은 실수나 잘못을 마치 심각한 죄를 짓고 타락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되면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신앙의 잘못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당대 최고의 의인이며 완전한 자라고 여겼던 노아의 실수는 인간의 실수에 대한 매우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비록 노아가 당대 최고의 의인이라고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노아 역시 실수할 수 있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지만 사람은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 작은 허물도 없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노아의 실수는 살면서 우리 모두가 범하게 되는 실수이며 수치이기도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허물과 수치가 있습니다. 남이 감추고 싶어 하는 허물이나 수치는 비록 내가 어찌 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모르는 채 감추어 주고 덮어주는 것이 지혜이며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잠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이 든 아버지의 모습은 비록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아버지로서는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수치였습니다. 창세기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의 하체를 노아의 둘째 아들이자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체를 보았다는 표현은 우연히 어쩌다 보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이며 고의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권위와 인격을 조롱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는 표현 역시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목격한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허물을 마치 조롱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에게서 아버지가 벌거벗은 채 잠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동생 함과 함께 맞장구를 치며 함과 같이 아버지의 허물을 구경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셈과 야벳은 함의 행동이나 자세와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하체 즉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도록 뒷걸음으로 장막에 들어가서는 겉옷으로 벌거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드렸습니다. 셈과 야벳은 호기심이라도 함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셈과 야벳은 함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 보호하며 혹여 나중에라도 아버지께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셨을 때 수치와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술에서 깬 노아가 자신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이 든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이 든 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고는 아버지의 허물과 수치를 덮어주기는커녕 조롱하며 형과 동생에게 떠 벌렸다는 사실과,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와서는 겉옷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정을 파악한 노아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저들의 행한 행동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물론 이 정도 일로 자식들의 장래를 두고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 노아의 모습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당시에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기에 노아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노아의 축복과 저주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술에서 깬 노아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내리는 축복과 저주 이야기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로 장막에 들어가 아버지의 허물과 수치를 덮어준 셈과 야벳의 사려 깊은 행동을 노아가 축복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치를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뻔히 쳐다보고는 그것을 형제들에게 떠벌린 사람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저주는 둘째 함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함이 아니라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노아가 내린 저주는 가나안은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는 저주였습니다. 종들의 종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관용어로 가장 비천한 종,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창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잘못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내린 저주는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입니다. 노아의 축복이 노아의 아들 셈과 야벳에게 내려졌다면, 마찬가지로 노아의 저주 역시 노아의 아들이었던 함에게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함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함이 넷째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노아는 왜 잘못을 저지른 함이 아니라 함이 넷째 아들 가나안에게 그 모든 저주를 내린 것일까요? 이것은 창세기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해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창10:6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노아의 저주는 실제 역사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노아가 축복한 셈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었으며, 노아가 저주한 함의 아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두고 이스라엘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던 가나안 족속의 조상이었습니다. 셈의 후손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후손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납니다. 결국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의 종이 되고 맙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실제 역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9장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해 소개하면서 유독 함에 대해서는 가나안의 조상이라고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의 실수에 관한 이야기는 훗날 이루어진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창9:18(새번역)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가 이스라엘의 조상 셈에게는 축복을 내리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의 조상 가나안에게는 저주를 내렸다는 노아의 축복과 저주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사건입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던 영적 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40년이나 광야를 전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대단하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에 의한 것이며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성취하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가나안 족속을 특정지음으로 노아의 저주가 인종주의적 해석이나 적용에 잘못 사용되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에서 누가 노아의 축복을 받고, 누가 노아의 저주를 받았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관심은 늘 교인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나눕니다. 하지만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저주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에는 하나님의 복처럼 여겨지는 일이 화가 되기도 하고, 당장에는 시련이나 고난, 또는 저주처럼 여기지는 일이 오랜 시간이 지나 복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기준을 가지고 함부로 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누가 노아의 축복을 받고, 누가 노아의 저주를 받았 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과 초점은 누가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노아는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의 후손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렸느냐는 것입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실제 역사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단순히 술에 깬 노아가 분노에 사로잡해 다분히 감정적인 축복과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은 그의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의 뜻에 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노아가 자신의 아들 셈과 야벳을 축복하고 함의 후손을 저주를 하였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다면,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고의로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은 것은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어쩌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든 노아를 아무도 보지 않았다면 아무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을 해프닝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가 벌거벗은 채 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았고, 자신이 본 아버지의 실수와 수치를 형제들에게 고의적으로 드러내어 떠벌렸습니다. 노아가 이것을 매우 악하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 역시 이것을 매우 악하게 여기십니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이야기를 통해 남의 실수나 허물을 고의로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노아가 함의 죄에 책임을 물어 가나안을 저주를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의 실수와 수치를 알기를 좋아하며, 자신이 알게 된 다른 사람의 실수나 수치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 또는 죄를 드러냄으로 그 사람을 깎아내리고 자신은 그 사람과는 달리 의롭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인간은 실수와 허물이 있으며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허물을 판단하시고 그 대가와 책임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판단하고 그것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행위이며 더 큰 죄를 짓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함으로부터 아버지의 실수를 들은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 쳐서 장막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 주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실수를 범하였지만 아버지의 실수와 수치를 덮어줌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주고 아들의 위치를 지킨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 하거나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셈과 야벳이 덮어주고 감추어 준 것은 의도치 않은 아버지의 실수이지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아버지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또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라면 그 죄를 고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는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이라면 마땅한 해야 하는 성도의 모습이며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겨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심으로 저들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남의 실수나 허물을 드러내어 고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굳이 내가 아니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두 사람들이 남의 실수나 잘못을 드러내고 고발하려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보면 그 허물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상대방을 어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 사함의 증거 또는 구원의 증거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감춰주고 덮어주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주는 영적 도전입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반드시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