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창세기 9:18-27, 10:6-20
창세기 강해 23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창세기 9장 18-27절의 말씀과 창세기 10장 6-20절의 말씀을 가지고 “노아는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 주 노아의 축복과 저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노아가 함이 아닌 가나안을 저주하였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설교를 들으신 분들 대부분은 노아가 함의 아들이었던 가나안을 저주하였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설교 후에 장로님께서 질문도 하셔서 제가 부연설명도 드렸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신 것 같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노아는 자신이 농사지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마시고는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벌거벗은 채 잠이 든 모습을 노아의 아들 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이 든 모습을 본 함은 벌거벗은 아버지의 몸을 덮어주는 것이 자식으로 해야 하는 마땅한 도리였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아들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도 덮어주기는커녕 조롱하듯 자기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었습니다. 함에게서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일을 전해들은 노아의 또 다른 아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는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의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자신이 술에 취한 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알고는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고 조롱한 아들을 저주하고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준 두 아들을 축복하게 됩니다. 만약 창세기 9장이 이 사건에 대해 기록하면서 노아가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고 조롱한 함을 저주하고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준 셈과 야벳을 축복하였다고 기록했다면 별 문제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은 노아가 아버지의 수치를 조롱하였던 함이 아니라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막내아들이었던 가나안을 저주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가나안의 경우와 비슷하게 노아가 셈과 야벳이 아니라 저들의 아들들을 축복했다고 한다면 그나마 형평성이라도 있어 억지로라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노아가 잘못을 저지른 함이 아니라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으며, 축복은 셈과 야벳에게 베풀어 주었습니다.
도대체 노아는 왜 잘못을 저지른 함이 아니라 자신의 손자이며 함의 막내아들이었던 가나안을 저주한 것일까요?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할아버지 되는 노아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를 지은 함 대신에 그의 아들 가나안이 엄청난 저주를 받게 된 것일까요?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창세기 9장 24절에 기록된 작은 아들은 함이 아니라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작은아들이라는 표현은 노아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벌거벗은 몸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함이 아니라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이었으며,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아버지 함에게 할아버지의 벌거벗은 사실을 알렸고 함은 이 사실을 자신의 형제들에게 알렸다는 것입니다.
창9:24 노아는 술에서 깨어 난 뒤에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매우 불분명한 근거를 기반으로 한 억지 주장에 가깝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작은 아들을 손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창세기는 이 모든 일을 함이 했던 일로 기록하고 있지 가나안이 시작한 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백번 양보해 작은 아들을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라고 한다고 해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리분별 못하는 손자가 할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는 이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에게 알렸다고 해서 손자를 저주하는 노아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만약 손자였던 가나안이 본 할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아버지에게 알렸다면 함이 자기 아버지의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었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사건입니다. 하지만 함은 다른 형제들처럼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기는커녕 아버지를 조롱했습니다. 따라서 작은 아들이 가나안이라고 한다고 해도 노아의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손자 가나안이 아니라 함이 받아야 훨씬 타당합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창세기 9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아무리 노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내리신 복에 대항하여 아들을 저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내리신 복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사람이 변경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함 대신의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창세기 10장을 보면 함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노아가 네 아들 모두를 저주했다면 이런 주장은 꽤나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함의 네 아들 가운데 유독 가나안만을 저주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 역시 노아가 왜 함 대신에 가나안을 저주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없습니다.
창9:1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창10:6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노아가 함의 네 아들 가운데 가나안만 유독 아버지 함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는 손자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손자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먼 훗날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과 그의 후손들이 저들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을 알고는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노아가 함 대신에 가나안을 저주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만약 노아의 아들 함과 함의 아들 가나안이 서로 비슷한 죄에 빠져있었다면 가장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손자 가나안이 아니라 아들 함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게다가 창세기 9장에는 가나안이 아버지 함과 비슷한 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주장 역시 근거 없는 일방적 주장에 불과합니다.
(이런 식의 모든 주장을 한국에서는 신조어로 뇌피셜이라고 합니다. 뇌피셜은 뇌와 오피셜(official)의 합성어로 개인적인 생각이나 주장을 마친 검증된 사실인양 말하는 것을 조롱하는 신조어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아는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러저런 추론이나 주장만 가능할 뿐이지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근거를 가진 이유라고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도무지 그 답을 찾기가 어려운 성경의 문제를 신학에서는 성경의 난제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도무지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적으로 성경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읽는 66권의 성경 가운데 원본 그대로인 성경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몇 번에 걸쳐 옮겨 기록한지도 모르는 사본만 있습니다. 원본도 아닌 사본만 남아 있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시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민족이나 나라도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해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다보면 지금 우리의 능력이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의 난제는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성도들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비록 아무리 오랫동안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신학자나 목사라고 할지라도 성경에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과 배경을 통해 그렇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거나 자신의 신학지식을 기초로 해서 자신만의 생각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성경의 난제라고 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하거나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누구도 성경의 모든 문제들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르는 것은 모르다고 인정하고 모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읽는 바른 자세이며 성경이 주는 교훈과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성경의 난제에 대해 자신의 잣대나 기준으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성경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지만 특별히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는 온갖 종류의 잘못된 주장으로 가득한 말씀입니다.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고 거기서 얻은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고 잠이 든 것을 마치 노아가 죄를 짓고 심각한 타락에 빠진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의미와 적용을 술에 취하는 것은 심각한 타락과 죄라며 술 취하지 말라고 적용하고 설교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술 취해서 실수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한 말씀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도주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유대문화와 삶의 일부분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포도주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행하신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셨으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이라고 하는 성만찬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을 노아의 타락과 죄라고 여기는 것은 포도주나 술에 대한 편견이나 지금의 교리라는 잣대를 가지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는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던 말씀이었습니다. 특별히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목사들은 노아가 축복과 저주 이야기를 근거로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이 종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이 된 아프리카 흑인들을 붙잡아다가 노예로 삼고, 저들을 차별하는 것은 성경에 의해 이미 예언된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교회를 다녔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도 인류의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여지가 조금도 없는 말씀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말씀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제멋대로 이용하는 매우 심각한 타락이며 죄입니다.
제가 노아가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한 것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음에도 이 사실을 주목해서 읽으라고 한 것은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막연하게 노아의 저주를 받은 사람을 함이라고 생각하고 저주를 받은 함이 세상으로부터 차별을 받거나 노예가 되는 것을 마땅한 일로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노아가 함이 아닌 가나안을 저주하였던 분명한 이유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 수 없는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탐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에 대해 외면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9장 18절부터 27절의 말씀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가나안이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노아의 세 아들로 인해 모든 민족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유독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함에 대해서는 그가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단순히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 한 명을 의미하기 보다는 가나안의 후손들 모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가나의 후손들이 이루는 모든 민족들에 대한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는 것은 셈과 야벳이라는 노아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이루는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창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창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의 아들 가나안이 노아의 저주들 받았다는 창세기 9장의 말씀 다음에 나오는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자세한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세 아들의 족보 가운데 함의 족보를 살펴보면 함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의 자손에 대한 기록에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함의 아들들 모두 하나같이 거대한 민족과 나라를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아들 구스에게서 나온 자식들이 가운데 니므롯이라는 아들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대단한 영웅이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힘이 센 장사로 그의 이름을 빗대 속담까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가 다스린 지역은 바벨론과 앗시리아와 니느웨와 레센이라는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창10:6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창10:8-9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함의 나머지 세 아들 역시 대단한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둘째 아들 이집트야 말로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제국을 이루었으며 이집트의 자손들 대부분 또한 거대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셋째 아들 리비아 역시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는 가나안의 후손들 역시 나름대로 큰 민족을 이루며 번성했습니다.
창세기 10장은 가나안의 후손들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 그들이 차지한 땅은 북으로는 시돈에서 남쪽으로 그랄과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동족으로는 소돔과 고모라 그길고 라사에까지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0: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다.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의외의 사실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흔히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는 함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과 그 주변에 걸쳐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의 후손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의 자손들을 가나안 땅에서 멀리 떨어진 서아시아와 유럽지역에 가서 정착하게 됩니다. 심지어 셈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은 함의 자손이었던 이집트의 노예로 무려 430년을 종살이 합니다.
물론 이집트의 노예에서 탈출한 히브리 민족은 40년을 광야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역사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누구의 후손입니까? 함의 첫 번째 아들 구스의 후손들입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실제의 역사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본다면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의 후손들 중에는 거대한 나라를 이룬 민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그저 그런 민족이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함의 자손들은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날린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축복과 저주가 뒤바뀐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 또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팩트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적 팩트에 대한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의미를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역사적 팩트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팩트가 아니라 팩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단순한 팩트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는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에서 노아가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받아들이고 인정할 만한 합리적이며 타당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답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신비로 남겨두고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에 초점과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가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알 수 없지만 노아가 셈과 야벳의 선행에 대해서 축복하였다면, 함이 지은 죄에 대해선 저주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노아가 축복한 셈과 야벳의 선행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수치를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덮어 준 것입니다. 반면에 노아가 저주한 함이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수치를 비웃고 조롱하며 심지어 다른 형제들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실수와 허물이 있으며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판단하고 그것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감춰주고 덮어주는 사람이야 말로 장차 하나님의 복을 받을 가장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반드시 있기를 축복합니다.